故 성완종 아들 "성일종, 아버지 상가에서 선거운동만 했다"
故 성완종 아들 "성일종, 아버지 상가에서 선거운동만 했다"
  • 조시현
  • 승인 2020.04.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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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故 성완종 씨의 아들 성승훈 씨의 입장문

故 성완종 서산장학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성승훈 씨는 13일 입장문을 통해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아버지 상가에서 선거운동에만 집중하던 숙부들을요”라고 성일종 미래통합당 의원을 저격했다.

성승훈 씨는 “그들의 친형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얼마나 억울한지, 얼마나 안타까운지, 숙부 들은 느끼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며 “숙부들은 본인의 가족들을 상가에 데려오지 않았다”고 성일종 의원을 비판했다.

이어 “유일하게 가족들과 함께 온 성일종 의원은 아버지의 상가에서 선거운동에만 집중했다”고 성 의원에게 비판의 칼날을 직접 겨눴다. 

성 의원은 2014년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故 성완종 씨의 막내동생으로 맏형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하겠다며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해 새누리당 경선에서 승리해 공천을 받고 충청남도 서산시-태안군 선거구에 출마했다. 당시 조한기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1.8% 차이로 신승한 바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역시 조한기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리턴 매치를 벌이고 있다.

이처럼 총선 투표 이틀을 앞두고 성 의원의 조카가 가족과 관련한 문제를 들어 성 의원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성 씨의 입장문 발표에 대해 성 의원 측은 "입장문 전체가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반박 보도는 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다음은 故 성완종 씨의 아들 성승훈 씨의 입장문 전문이다.


송구의 말씀
 
변변치 않은 저희 가족 내부 이야기가, 가족 간의 신뢰부족으로 인하여 소란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이웃 여러분들께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많이 송구스럽습니다. 그간 부족한 저로써는 집안 흉사와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올리지 않는 것이 옳다 판단하여 조용히 일을 처리해왔으나, 최근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을 올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부친과 조부모의 분묘에 관하여
저희 부친인 (故)성완종 서산장학재단 이사장과 조부모님들의 분묘가 2018년부터 현재 까지 소송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저는 저희 부친의 분묘를 파묘하고 화장을 하여 제가 현재 거주하고 있 는 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저로서도,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해주셨던 분들로서도 많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고향인 어머니 옆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던 마지막 부탁도 지켜드리지 못하게 되어, 자식인 저로서도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가슴 찢어지는 결정이었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현역 지역 국회의원인 저희 숙부가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펼치지 않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론, 반반론이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저는 분묘토지소송의 당사자로서, 제 책임 하에 행동을 결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일종 의원을 비롯한 세 분 숙부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는 하였으나, 저 역시 그 분들과 적극적 인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 분 숙부들과 가족 간의 신뢰 및 의사소통이 줄어든 것은, 제가 2014년부터 겪었던 일련의 경험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분묘에 얽힌 사연을 설명드릴까 합니다.
 
1. 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
아버지를 최측근에서 모시던 박준호 비서실장으로부터 나온 이야기 입니다. 검찰조사와 회사파산위기로 안팎으로 뒤숭숭하던 2015년 초, 아버지는 박모 실장을 통해 통장에서 2억원을 현금으로 인출하여 관리를 맡겼습니다. (아버지 통장의 대부분은 박 실장과 이모 보좌관이 관리하였습니다.) 박 실장은 이 현금을 서울 답십리소재 경남기업 3층에 있던 본인 사무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 중 아버지 변론을 맡은 오모 변호사 수임료로 3천만 원, 월급이 끊겨 고생하고 있던 임모 비서와 여모 비서의 월급으로 1천만 원을 지급하였습니다. 구속될 것이 확실하다고 직감한 아버지는, 구속영장실질심사 몇 일 전, 박 실장에게 마지막 지시를 합니다.
 
“내가 구속이 되면, 남은 1억 6천만원을 꼭 고향 후배들에게, 재단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해다오” 이 마지막 부탁은 아버지가 박 실장에게, 그리고 서산장학재단에게 남기신 유언이 되었습니다. 박 실장의 금고에 있던 현금 1억6천만 원은 검찰의 경남기업 본사 압수수색 시 박 실장 사무실에서 수사관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압수품목 반환 시점에 박 실장에게 돌려졌습니다. 박 실장이 현금을 돌려받은 때는, 이미 아버지는 목숨을 끊으신 이후였습니다. 박 실장은 이 돈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유언과 함께 성우종 숙부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성우종 숙부는 알았다고 하면서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박 실장은 저와의 전화통화에서 현금 인출, 사용, 압수, 반환 및 아버지가 남기신 말씀, 그리고 (현)서산장학재단 후원회장인 성우종 숙부에게 유언과 함께 현금을 전달한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하지만 2020년인 지금까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서산장학재단과 고향후배들 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산은 아직까지 아버지의 유언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 경남기업의 파산 이유
경남기업 파산의 직접적인 이유는 흔히 알려진 바와 다릅니다. 많은 언론에서, 베트남 랜드마크 빌딩의 과도한 부채로 인해 경남기업이 파산에 이르렀다고 지적 합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경남기업 파산의 주요원인은 외부세력과 결탁 한 내부인사의 계획된 획책과 배신입니다. 경남기업은 2014년 1월,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 채권단과 워크아웃 협약을 맺습니다. 워크아웃 플랜에 따르면, 랜드마크 빌딩은 별도 프로젝트로 관리되어, 랜드마크 빌딩의 위험이 경남기업 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랜드마크 빌딩을 잘 팔아 많은 수익을 남길 경우, 경남기업 본체의 워크아웃 졸업에 도움을 주지만, 랜드마크 빌딩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경남기업 본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협약이었습니다.

[2014년 말 – 2015년 1월]
아버지가 2014년 11월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부터, 경남기업 안팎으로부터, 랜드마크 빌딩이나 광주수완에너지발전소 같은 회사의 알짜 자산들을 외부세력이 노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초부터 장모 사장, 한모 부사장, 하모 기획실장 등은 노골적으로 법정관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회사가 법정관리를 가게 되면 장 사장이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되도록 외부에 서 조율을 해 놨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가까운 국정원 출신 미국로펌 코빙턴 고문이 ‘장 관리인’ 로비를 끝내놨다.” “장 사장이 관리인이 되면 수수료만 100여억 원에 달하는 랜드마크 빌딩 매각자문사를 가까운 쪽으로 교체할 것이다”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해갔습니다. 이들은 워크아웃 중이었던 경남기업의 법정관리행을 지지하고 자신하고 있었으며, 법정관리를 신청할 경우 장 사장을 관리인으로 추천할 것을 지지하는 사내세력을 포섭하여 늘려가고 있었습니다.
 
[2015년 2월: 재무총괄부사장의 의도적 회계장부상각]
2015년 구정 직전인 2월 17일(혹은 16일), 경남기업 회장실에서, 재무총괄부사장 한 씨는 아버지한테 폭탄발언을 하고 사무실을 나가버립니다.

“경남기업 망했어요”
그는 이 발언과 함께 2014년도 결산서류를 아버지 앞에 던져놓고 회장실 문을 열고 나가버립니다. 한 부사장은 2014년 결산을 진행하면서, 회계서류상 개재되어 있던 “공사진 행률수익”을 모두 상각시켜 버렸습니다. 통상적으로 건설회사들은 매출의 10-30% 정도의 공사진행률수익을 인식하고 갑니다. 현대건설도 그렇고 삼성물산도 그렇습니다. 보통은 회계감사법인이 공사진행률 수익을 낮게 책정하려고 노력하고 회사측은 적정선을 유지해 달라고 방어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한 부사장은 본인이 나서서, 회사 이사진을 비롯한 주요관계자와 한마디 상의 없이, 공사진행률 수익을 0에 가깝게 모두 깎아버렸습니다. 경남기업은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천억의 공사진행률 수익자산을 날리게 되어 자본잠식 및 부채비율 기준미달로 주식거래소 상장폐지조건에 들어가 게 됩니다. 이것이 경남기업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공사진행률 수익자산 대량상각과 같은 대형이슈들은 통상 당해년도 연말전에 주요 관계자들과 상의 및 대책마련이 이루어집니다. 한번에 회사 매출과 자산의 상당 부분을 깎아먹는 이슈니까요. 한 부사장은 경남기업 오너와 채권단, 그리고 선의의 이사진이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일부러 주지 않기 위해, 설 연휴 직전인 2월 17일까지 해당사항에 대해 일부러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2015년 설 연휴 이 후인 2월 23일은 3월 결산법인의 상장폐지 등을 막기 위한 업무의 시작일로는 이미 너무 늦었었습니다.
 
[2015년 3월: 법정관리인 셀프추천을 통한 회사장악과 성완종 회장 축출]
한 부사장의 의도적인 대형자산상각 (2015년 2월 말) 이후, 경남기업은 급격히 흔들리게 됩니다. 게다가 3월 18일부터 급작스럽게 시작된 검찰조사는 조사대로 받으면서 아버지는 결국 회사의 법정관리 신청을 준비합니다. 법정관리행은 장 사장, 한 부사장, 하 실장 등이 원하던 시나리오로서, 이들은 장 사장을 법정관리인으로 회사에서 추천하고, 외부로비세력이 그들에게 약속한 대로 법원이 장 사장을 관리인으로 선임하게 하여, 성완종 회장을 구속시키고 회사의 실권을 잡으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랜드마크 빌딩, 광주 수완에너지발전소 뿐만 아니라, 동북선경전철사업권,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포천화도 구간사업권, 베트남 비엣찌 물재생사업권 등 회사의 알짜 자산들을 어떻게 처분 하면서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득을 도모할지 공공연한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본인은 대주주로서 모든 책임을 지더라도, 회사는 살려야겠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계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서산 장학재단과 경남기업이 아버지의 전부였으니까요. 아버지는 법정관리를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회사를 잘 아는 금융권 출신이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에 적합한 복수의 인사와 면담을 갖고, 그 중 적합한 두 분을 관리인으로 법원에 추천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등기이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 의견을 등기이사들에게 건의하여 이사회를 거쳐 관리인을 법원에 추천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등기이사들 중 사내이사들(장 사장, 한 부사장, 하 실장)을 불러 금융권과 경남기업에서 모두에서 경력을 쌓은 관리인 후보 두 분을 법정관리 신청과 함께 법원에 추천해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 미팅은 경남기업 3층 회장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금융권 출신 관리인 후보를 추천하자, 장 사장은 성완종 회장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관리인은 현직사장인 나로 추천되어야 한다”고 소리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한 사장과 하 실장은 반협박조로 아버지에게 장 사장을 관리인으로 추천해야 한다고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부하들의 불공경함 억지 주장에 기가 질려 버린 아버지는 내일 이야기하자면서 미팅을 미뤄야 했습니다.

다음날 미팅에서도 본인들의 의견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 사장 일행은 회장실을 막아버리고 아버지를 회사 건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아버지는 회사 근처 작은 오피스텔에서 급하게 대책회의를 하고, 노동조합 간부들과 자장면집에서 법정관리 신청에 관한 회의를 하여, 결국 노조의 도움으로 다음 날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 사장 일행은 여전히 장 사장의 법정관리인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 다음날, 오너인 아버지의 의견을 묵살한 채 장 사장 본인을 관리인으로 스스로 추천한 이사회를 진행하여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법정관 리를 신청하였습니다. (2015.3.27일, 매경 [단독]법정관리 신청한 경남기업, ‘내부 의 난’도 발생)
 
돌이켜보건대, 아버지가 극단적인 생각을 시작한 시기가 이 날인 것 같습니다. 평생 분신 같았던 회사를, 믿었던 가신들의 배신으로 법정관리 신청을 하면서,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당하고, 회사에 대한 마지막 끈인 관리인 추천마저 그들의 배신으로 이루지 못한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놀라웠던 것은, 아버지를 배신한 장 사장 일행에 이 보좌관(홍보부장)이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홍보부장이던 이 보좌관은 아버지를 회사에서 축출하고 아버지 의사와 다른 관리인을 추천하는 데에 핵심멤버로서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장 사장은 성일종 숙부의 추천으로 2013년 사장으로 영입되었습니다. 회사 사장으로 일을 하면서, 그리고 2015년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마지막 법정관리 신청까지 꾸준히 성일종 숙부와 대소사를 상의하였다고 한 사이입니다. 한 부사장은 성일종 숙부가 대아건설 재무팀장으로 재직 시 가장 총애하던 부하직원으로서, 성일종 숙부가 회사를 나간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고, 성우종, 성일종 숙부의 회사를 경남기업 측에서 도와주는 창구였습니다. 이 보좌관은 현재 성일종 의원의 비공식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보좌관은 2002-2003년경 한 부사장의 추천으로 경남기업에 입사하였습니다. 둘은 충주 출신으로 회사 내에서도 충주모임 등을 결성하는 등 가장 가까웠고, 지금도 각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3. 아버지의 장례식
언젠가 곽상언 변호사가 쓴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치인의 장례식에는, 슬프기만한 가족과는 다르게, 온갖 종류의 조문객이 있다는. 인간 오욕칠정의 모습을 장례식에서 다 볼 수 있다는,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고 고맙다는 글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마지막 순간에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던 죄책감. 그 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심은 안하시지 않으셨을까하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자괴감. 왜 진작 못 알아 차렸을까하는 원망. 머릿속에 한가득한 이 생각들 반대편에서는, 계속해서 증거를 인멸하려 하고, 수시로 말을 바꾸던 검찰에 대응해야 했고, 상가는 차려졌으며, 서산의료원을 꽉 채운 기자분들과 조문객분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충격은 눈물을 잊게 만들더군요.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과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기억하고, 억울하시더라도 잘 보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몸이 알아서 버텨줬습니다. 많은 문상객들이 찾아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정치적 의무감에 오신 분들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인연으로 찾아오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마웠던 건, 예전에 작은 장학금이라도 받았던 것이 고마우시다고, 감사하다고, 아들 딸 손잡고 찾아주셨던 분들, 그리고 장학금 학우 가족 여러분들이었습니다. 그 분 들이 아버지 영정 앞에서 제 손을 꼭 잡아주실 때에는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부터의 제 이야기를 나무라신다면 저도 굳이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아버지 상가에서 선거운동에만 집중하던 숙부들을요. 그들의 친형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얼마나 억울한지, 얼마나 안타까운지, 숙부 들은 느끼지 못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숙부들은 본인의 가족들을 상가에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선거운동의 당사자인 성일종 숙부만 온가족이 상갓집에서 선거운동에 집중하고 있었을 뿐, 성우종, 성석종 숙부는 숙모들과 사촌들을 상가에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두 분 숙부들에게, 숙모들과 사촌들이 오지 않을 거면 숙부들도 상가에서 나가시라고 말씀드린 이후에야 가족들을 데려와 간신히 조문만 드리고 갔을 뿐입니다. 억지로 끌려나와 향 피우고 갔을 뿐, 가족으로서 예를 다하려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의 상갓집에는 형의 죽음을 기회로 잡기위해 노력하는 동생 3명이 있었을 뿐, 친형의 사고를 황망해하는 가족은,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4. 1주기 추모행사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던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수사와 아버지 죽음에 관한 수사, 상속문제, 그리고 법정관리로 인한 수많은 소송들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 숙부들이 서산장학재단을 운영하겠다고 나섰고, 곧이어 재단 집행부를 본인들의 추천인사로 구성하였습니다. 이후 재단집행부는 제가 보기에는, 성일종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같은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2015년 말, 숙부들이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하기로 결정하면서 저는 반대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무리에, 아버지의 동생이 공천을 신청하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반대의견개진 이후로 숙부들과 저는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2016년 초부터 저는 4월 9일, 아버지 추모식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가 각별히 애정을 쏟으셨던 장학재단과 숙부들 측에 추모식에 대한 의견을 구했습니다. 특히 장학재단에서 아버지와 인연이 깊으신 분이 추모사를 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 봤었습니다. 초기에 재단집행부는 재단에서 추모행사를 주최하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추모에 큰 사명감을 갖고 정중하게 고인을 기리자는 의지도 전달해 왔습니다. 그러나 2016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될수록 상황은 꼬여갔습니다. 저는 아버지 추모행사에 정치행위가 개입되지 않는데 신경을 썼습니다. 정치의 희생양으로 돌아가셨고, 유서에도 정치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밝히신 아버지께, 다시는 정치관련 사항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점퍼를 입고 아버지 무덤을 찾은 숙부에게 경악을 금할 수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일체의 정치색을 배제한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선거 상황에 따라 재단집행부는 점점 더 성일종 후보의 상황을 대변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황당무계한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대접할 수 없는 선거법에 맞춰 아버지께 술이 아닌 물을 올리라”라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서 시작하여, 공천을 받기 전에는 크게 행사를 원했다가, 공천을 받은 이 후에는 아예 추모행사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등 상식을 벗어난 요청을 지속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추모제는 제가 단독으로 진행했습니다만, 본 행사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인원까지 보내어 상황을 제어하려는 숙부 측과 재단집행부에 크나큰 실망을 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숙부가 국회의원 선거와 당선을 형의 제삿날보다 우선시한다면, 그것은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조카가 아버지 제사를 지내겠는 것을 훼방한다면, 그것은 가족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묘소송
[분묘소송의 배경]
한국 금융제도상, 아버지는 대주주였던 경남기업의 대부분의 차입금에 대해 연대보증을 하셨습니다. 건설회사의 차입금 규모를 고려할 때, 개인의 연대보증이 큰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대출을 차입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개인의 연대보증이 꼭 필요했습니다. 믿었던 부하들의 배신으로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아버지의 연대보증도 실행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연대 보증한 경남기업의 차입금 규모가 수천억 원에 이르기 때문에 가족들은 상속포기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산들은 우선순위에 따라 은행들의 소유로 넘어가 경매처분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묻혀 계셨던 음암면 도당리 임야도 아버지 명의의 토지였기 때문에 경매절차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고향에 계시고 싶어하셨던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자면 해당 토지를 경매에서 재낙찰 받거나, 고향의 다른 토지로 세 분을 같이 이장하여 모시는 것이 가장 응당한 절차이나, 저 역시 경남기업 계열사에 제공한 연대보증으로 인하여 채무불이행상태에 처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제 이름으로 세 분을 모실 토지를 취득할 수가 없는 상황이 저도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2017년 10월 30일 경매에서 한 구매자가 2.7억여만 원에 해당 토지를 낙찰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재판경과를 볼 때, 이 구매자의 목적은 ‘부유해 보이는 가문의 분묘가 위치 한 토지를 비싼가격에 되파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분묘소송 경과]
2017년 말부터 구매자는 편지와 전화, 문자 메세지, 내용증명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본인이 토지를 낙찰받았고, 분묘에 대해 협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습니다. 구매자의 서신을 통해 저뿐만 아니라 세 분 숙부들에게도 똑같은 내용을 전달하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매자는 심지어 음암면 면사무소를 통해 저와 숙부들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구매자의 서신에 비추어 볼 때, 대화를 진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여 대응을 하지 않은 채 묘소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숙부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숙부들로부터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처한 상황에서 어떤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였습니다. 숙부들의 의견이 없음을 확인한 후, 저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조부모를 모실 수 있는 토지를 구매할 자격이 없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숙부들의 진심을 본 후, 아버지가 숙부들의 토지에 묻히시는 것도 솔직히 달갑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원치 않으셨던 어머니 명의 토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018년 8월 14일, 구매자는 저에게 분묘굴이 또는 지료납부를 요구하는 소송을 청구하였습니다. 재판과정 중에 저는 재판장님과 원고(구매자), 그리고 재판외부의 숙부들에게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아버지 묘소는 아들인 내가 책임지겠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는, 비록 내가 장손이긴 하지만, 생질인 아들들이 해당 주소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을 제쳐두고 내가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조부모 묘소에 대해서는 숙부들에게 물어봐 달라” 숙부들은 역시나 대답이 없었고, 제가 출석했던 재판 중에도 재판장께서도 상황이 신기하셨는지 “피고의 숙부가 이 지역 국회의원이신지”를 재차 확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의 제한적인 상황과, 아버지가 묻혀 계신 토지가 소송에 휘말려 있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토지가 필요하지 않은 곳으로 아버지를 모시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파묘를 하는 것과 시신을 모셔서 화장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오랜 번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한 여러 종교서적과 장례예법에 대한 공부와 아버지를 아껴 주셨던 스님과 목사님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파묘와 화장을 결정한 이후, 화장장을 예약하기 위해서는 한 달 전에 개장신청을 해야했습니다. 음암면사무소에 개장신청을 하면서 숙부 측에 화장결정을 알렸습니다. 서산장학 재단은 숙부들이 관리하고 있었고, 1주기 추모행사 이후로는 다른 분들과는 연락을 안했기 때문에 따로 연락을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숙부들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2018년 11월 10일, 정성스럽게 아버지를 모셨고 이후부터는 제가 있는 곳에 함께 모시 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결정을 내려 모셨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는 숙부들의 의견을 듣기 전까지 제가 단독으로 행동하기 어려웠습니다. 숙부들의 대답은 못들은 채 소송은 지리하게 진행되었고 2019년 9월 18일에 마무리되었습니다. 법원은 기이용토지사용료 48만6720원과 이후 월 4만3600원 씩을 납부하라고 판결하였습니다. 2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법원 판결이 나오자, 이번에는 숙부 측 이 보좌관이 제 대리인에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토지이용료를 내겠다는 의사를 밝혀 와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숙부 측은 토지이용료를 보낼 원고(구매자)의 계좌번호를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대리인을 통해 원고(구매자)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 메세지로 계좌번호를 물어보았으나 역시 답이 없었습니다. 구매자의 목적은 월 4만원 씩 토지사용료를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겠죠. 고의로 사용료징수를 회피하던 구매자는 2019년 12월 27일에 다시 저에게 소송을 제기합니다. 사용료를 본인이 토지 경매 낙찰받은 시점부터 내지 않았으니, 분묘기지권이 소멸했음을 확인해달라는 청구였습니다. 소송절차에 토지사용료를 공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이를 숙부 측에게 물어봤더니 공탁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와 2020년 4월 7일에 숙부들의 돈 122만9280원이 공탁된 채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탁의 말씀

최근 몇 년간 발생한 저와 숙부들 간의 신뢰부족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인해 아버지의 진정성이 훼손될까 죄송하고 두렵습니다. 저희 아버지 고(故) 성완종의 두 가지 진심을 꼭 알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장학사업을 천명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유튜브 방송에서 아버지의 장학사업 의도를 의심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 이십여 년 동안 제가 바라본 장학사업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순수하고 한결같았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어려움을 후배들이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항상 고민 하고 연구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고향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고향에 있고 싶어 하셨습니다. 바다던 산이던, 아버지는 서산과 태안의 자연이 최고라고 하시면서 항상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도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해외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기보다 항상 고향으로 가시곤 했고, 어린 마음에 저는 이게 불만인 적도 있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써, 아버지를 그렇게나 사랑하시던 당신 고향에 편안히 모시지 못한 것은 저에게도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 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열심히 일하셨고 심혈을 기울이신 업무는 태안기름유출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기업과 정부의 지지부진한 대화 태도에 분노하셨고, 피해로 신음하고 있을 이웃들을 기억하며 발로 뛰어 내가 해결하겠다고 뛰어다니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보상금규모가 타결이 되었을 때 집에서 조용히 신문기사를 보시면서 몰래 뿌듯해하시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 모습들이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 성완종입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성승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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