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1 14:32 (수)
[기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새롭게 보자
[기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새롭게 보자
  • 여석주
  • 승인 2019.07.29 09: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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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연해주를 새롭게 보아야한다.
둘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새롭게 보아야한다.
셋째, 최재형 선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정리해야한다.

이 글은 최근 북한과 중국, 러시아 접경 지역 답사를 다녀온 여석주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기고한 글입니다.


북한대학원의 현장답사 프로그램은 지난 20년간 연구지향적 프로그램 구성과 숨돌릴 틈 없는 일정 구성으로 유명하다. 2019년 하계 답사 역시 7월 13일부터 19일까지 연해주, 연변조선족자치주, 북·중 국경지대를 아우르는 1,600키로미터의 버스 여정으로 이루어졌다.

답사일정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7월 13일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동진정책 흔적을 답사하면서 21세기 푸틴의 동방정책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7월 14일은 해동성국 발해의 옛 성터를 발로 밟으며 우리 선조들의 거대한 스케일을 느끼는 동시에, 1860년대부터 이어진 조선 농민의 이주, 정착의 역사와 최재형 선생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 항일투쟁의 위대함과 처절함을 간접 체험하면서,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 단원들이 말달렸던 A-370 연해주 종단도로를 따라 북·러 국경 도시 우스리스크로 이동하였다.

7월 15일은 연해주와 두만강 하구의 이어짐을 조망하고, 한 때 8만여명의 조선 농민이 정착지를 형성했던 상··하 연추를  따라 중·러 국경을 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 도시인 훈춘에서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두만강  하구 및 나진선봉지구와 어떻게 이어지는 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방천전망대에서 두만강 하구에 기하하적으로 얽힌 북··러 국경선을 그려본 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 연길에서 남북이 어우러지는 답사 3일째 밤을 보냈다.

7월 16일은 연길 소재 연변대학에서 북한경제 전문가와 최근 북한 경제 상황을 살펴보고 토의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진 후, 두만강변을 따라 접경지역을 발로 밟아보고 두만강수에 직접 손을 담그면서 이도백하로 이동하였다.

7월 17일은 우리 민족의 성지 백두산을 오르고  천지와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비록 중국명 장백산의 서파를 경유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일일 4만명의 등반객 중 천지와의 만남을 헤어졌던 친지와의 그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한민족 뿐이었을 것이다. 백두산을 내려와 압록강변 답사의 시작을 위해 북한 혜산의 대안, 장백산조선족자치현으로 이동하여 숙박하였다.

7월 18일 아침, 압록강 건너 늘어선 북한 혜산의 낡은 집 지붕과 장백산현 소재 현대식 건물의 대비 속에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압록강변 답사를 시작했다. 김정숙읍, 김형직읍, 중강진을 거치며 양안의 대비적 풍경에 가슴은 메어졌지만, 한때 북측의 살림살이가 더 나았던 적도 있었듯이 언젠가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통화에 여장을 풀었다.

7월 19일 귀국 항공기를 타기 위해 심양으로 이동하는 그 길은 한때 고구려 개마 무사들이 말달렸던 그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 주변에는 고구려의 옛 체취가 깊게 남아있는 곳이지만 부족한 시간 탓에 가이드의 설명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 변방 소수 민족의 그것으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세 글자에 동공이 커지고 심박이 빨라지는 이는 우리 뿐일 것이다. 

땅과 그 땅을 살아온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이번 답사에서 돌아본 연해주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최재형 선생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평가도 21세기 동북아 환경에 맞춰 새롭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연해주를 새롭게 보아야한다.

연해주는 1850년대 가뭄을 피해 국경을 넘은 조선 함경도 농민의 정착지로서 한민족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오십년의 짧은 기간 동안 20만 조선인의 정착지로 성장한 연해주는 나라 잃은 백성의 새터인 동시에 구한말 항일투쟁의 본거지였다가 1937년 소련 정부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역사 속에서 소멸되었다. 그로부터 60년후 연해주는 한국 상품의 러시아 수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로 다시 주목을 받아 왔다. 앞으로 연해주의 진정한 역할은 북한 개혁개방과 함께 북한 진출을 위한 발진기지로 새롭게 조명받을 것이다. 특히 두만강 하구와 연한 하산항은 육로·철로·해로를 갖춘 최적의 물류기지로 성장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점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려인(연해주 동포) 후손들이 연해주로 돌아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대북 프로젝트의 최적 파트너로서 이들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둘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새롭게 보아야한다.

연변주 지역은 연해주 지역과 함께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농민의 정착지요, 항일투쟁의 본거지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에 기여한 공로로 조선족(연변주 동포)은 자치권을 얻었으며 고유의 전통문화를 보존해왔다. 한중 수교 이후 연변주는 한국상품의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과 한국 본토에 양질의 인력공급 기지 역할을 해주었다. 앞으로 연변주의 진정한 역할은 북한 개혁개방과 함께 북한 진출을 위한 발진기지로 새롭게 조명받을 것이다. 특히 북·중 국경선의 대부분이 연변주 관할 지역이고,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출발점이 연변주 훈춘으로 선정된 만큼 연변주는 육로·철로·해로·공로를 갖춘 최적의 물류기지로 성장할 것이다. 단, 연변주의 우수 동포 인력의 상당수가 한국에 들어온만큼 이를 대체할 인력자원을 양성하고 공급할 필요가 있다. 대북 프로젝트의 최적 파트너로서 연변주와 연변주 동포들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재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셋째, 최재형 선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정리해야한다.

최재형 선생의 항일 업적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것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했다는 정도에 그친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열살에 연해주로 넘어 갔다. 연해주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상선 선장의 양아들이 되어 세계 곳곳의 바다를 항해하고 유럽 항구에서 선진 문명을 접한 후에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연해주 도로건설 사업과 군납업으로 거부를 달성한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동포거주지의 행정 수반과 경제적 후원자인 동시에 사재를 털어 무장 항일투쟁을 지원하였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서는 단순 조력자가 아닌 거사의 전반을 계획하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공작에 의해 지위와 재산을 잃고 마침내 일본군 헌병에 의해 총살되었다. 최재형 선생의 인생은 그 자체가 연해주 동포의 정착기이자 빛나는 항일투쟁의 역사였다. 최재형 선생의 삶은 동 시대의 위대한 개츠비보다 더 드라마틱했으며, 항일투쟁의 역사에서 김구 선생이나 이회영 선생의 업적에 전혀 뒤지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7박8일간의 답사를 통해 지리적으로 1,600키로미터를 달리며 천년의 한민족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이번 답사의 성공에 기여한 분들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도 학교 측의 세심한 준비와 현대아산의 축적된 경험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뜨거운 민족애와 역사의식을 겸비한 두 분의 가이드, 연해주의 김용정 선생과 연변주의 김진환 선생, 두 분의 헌신적 봉사가 절대적이었다. 

바야흐로 동북아와 한반도에 새시대가 열리려는 시점에 조··러 답사의 중요성은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특정 역사의 주인은 그 역사를 듣고 가슴 뛰며 기억하는 사람이며, 특정 공간의 주인은 그곳에 가면 터져오르는 기쁨에 목이 메는 사람이다. 우리는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방법으로 그 역사와 공간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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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2019-07-29 10:20:48
최재형선생님의 일생은 영화로 꼭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