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원 칼럼] 중앙일보와 이진주 전 기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대원 칼럼] 중앙일보와 이진주 전 기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전대원
  • 승인 2019.07.27 18:4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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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주체는 있으되 사과의 대상은 없는 이상한 사과문
역사의 대화처럼 새로운 텍스트가 나온다면 또 그 때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생각이다.
출처 : 2019년 7월 4일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 페이스북

맥락과 주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글이었다.

첫 인용 글에서 ‘어찌 됐든’이라는 말로 퉁치고 당시의 맥락을 넘어간다. 슬프고 황망한 일을 겪은 사람은 대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죽은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고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라는 논리는 보통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영원히 진실을 묻어두고 싶을 때 하는 이야기다.

가장 궁금해 하는 대목에서 이진주 전 기자는 ‘어찌 됐든’이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갔다.

맥락 상 이진주 전 기자에게 왜곡을 강요했을 것으로 읽히는 ‘우리 선배’는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평한다. 조직은 사람과 다르다면서 그들에 대한 비난가능성을 차단하는데, 나는 ‘조직과 사람이 다르다’는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말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 역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자신을 방어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다. 조직이 유기체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행동하고 말을 한단 말인가? 흔히들 말하는 ‘국민’, ‘민족’, ‘국가’ 등을 내세우는 언술 등이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 경찰은 자신이 했다고 하지 않는다. 국가가 판단한다고 한다. 국가가 자신의 몸에 빙의하여 지시한다는 영적 체험을 말한다고나 할까. 여기에 <변호인>은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새로운 논리를 내세운다. 둘 다 이데올로기라는 면에서 똑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고문 경찰이 말하는 국가는 말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허상의 주체이지만, <변호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국민은 고문 받고 피투성이가 된 대학생이라는 권리의 주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거란 예감은 이 반성문을 보면 모두 드러나 있다.

도대체 자기가  쓴 것은 무엇이고,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출처 : 2019년 7월 8일 <중앙일보>의 해명문

<중앙일보>는 ‘의도적인’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왜곡과 과장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어물쩍 넘어간 것이다.

이진주 전 기자의 페북 글에도 데스크의 사주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단다. 맞다. 텍스트로  확인되는 팩트는 이진주 전 기자가 노건호 씨에 대한 취재를 지시 받았다는 것이고, 이진주 전 기자의 주장은 데스크가 알고서도 자신이 송고한 기사를 그대로 내보냈다는 것이다.

왜곡된 기사를 쓴 주체가 이진주 전 기자인지, 데스크인지는 포스팅의 텍스트로는 알 길이 없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기사의 내용 자체에 대해 이진주 기자는 데스크가 허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중앙일보>는 슬쩍 넘어가고 있다. 이진주 전 기자가 취재해서 가져 온 내용을 토대로 기사가 쓰였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중앙일보>가 밝혀야 할 것은 데스크의 사주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그건 중앙일보 입장문에 나와 있는대로 이진주 기자의 페북 글에도 없는 내용이니),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 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사를 내보냈느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메신저가 하는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걸 그대로 전하면 거짓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중앙일보> 입장문은 바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길게 끌어봐야 득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서로 이심전심 멈춘 모양이다.

둘의 공통점은 하나 있다.

교묘한 글재주로 할 수 있는 책임모면의 술화 구조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미묘한 논점 비켜가기를 행사한다.

이 두 글은 고이 박제해 모셔두었다가 언젠가 최악의 글쓰기 예시에 사용하여야겠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개인과 조직 사이에 나올 이야기를 다 듣고 판단하려고 기다렸던 것이다. 물론 두 개의 글만으로도 상황판단은 어느 정도 되었지만, 그래도 나름 공식적 절차를 준수하며 시간을 묵혔다.

이진주 전 기자의 반응이 없을 걸로 확인되는 시점에 이 글을 쓴다.

사과의 주체는 있으되 사과의 대상은 없는 이상한 사과문으로 시작된 사건의 텍스트와 맥락. 아마 당분간 새로운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역사의 대화처럼 새로운 텍스트가 나온다면 또 그 때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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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정 2019-07-28 08:55:47
글 감사합니다.

김다혜 2019-07-28 06:29:02
사람들이 이렇게 철면피에요. 글로써 자신의 생각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제일 진실되어야 할 인간들이 글을 방패막이로 자신들의 추악한 면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건 여기에 넘어가는 멍청한 인간들이죠. "이만큼 사과했음 됐다" "자꾸 추궁해서 얻는 게 무엇이냐"는 둥 한심한 소리 많습니다. 분명 이런 자들의 추악한 짓은 계속해서 회자되어야 하고 그때마다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이런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엔 노대통령님이 사라지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