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이희호 여사, 영원히 잠들다
민주주의자 이희호 여사, 영원히 잠들다
  • 조시현
  • 승인 2019.06.11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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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지
한국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썼던 사회운동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영원한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향년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 여사는 지난 3월부터 병세가 악화해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 왔다.

가족과 동교동계 인사들은 4월 장남이자 의붓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을 때도 이 여사의 병세 악화를 염려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이낙연 국무총리,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등이 이 여사의 임종 직전 병원을 찾았다. 정치권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독자적인 여성·정치활동을 해온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애도가 쏟아지고 있다.

■ 한국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써 내려가다
이 여사는 3·1운동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22년 서울 수송동에서 6남2녀의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기씨는 우리나라 ‘의사면허 4호’였을 정도로 가정환경은 유복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이순이씨의 영향으로 모태신앙인이 된 그는 이화여고·이화여전을 다녔지만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고, 이후,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이 여사는 대학 재학 중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사범대 대표를 맡는 등 당시 강요되던 ‘얌전한 여학생’ 딱지를 거부했다. 발랄하고 활동적인 리더 타입으로 남학우·여학우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의 삶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는 피난길에도 이태영·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1950년), 여성문제연구원(1952년) 등을 창설하는 데 일조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인생의 동반자’ 김대중과의 첫 만남도 이 무렵이었다. 이 여사가 활동하던 대한여자청년단은 1·4 후퇴 당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해운회사 사장 김대중의 도움을 얻었는데, 이후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대중과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도 이뤄졌던 것이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 여사는 이 모임에 간헐적으로 참석한 청년 김대중과 교우하며 신뢰를 쌓았지만 곧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 스카릿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귀국한 그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강단에 섰다. 이어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 등을 맡으며 일천한 한국의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썼다.

이후 유학과 사회생활로 해박한 지식을 쌓은 이 여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을 지닌 김 전 대통령은 자주 만나 대화하며 서로를 향한 호감을 키웠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이유를 묻는 지인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잘생겼기 때문”이라고 하곤 했다.

지난 2008년 펴낸 평전에서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며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회고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노모와 전처 소생의 아들 둘을 둔 무일푼의 정치인이었다.

■ DJ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다
1962년 ‘정치 낭인’ 김대중과 결혼 이후, 이 여사의 앞에는 40년 세월의 가시밭길이 놓이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이 정권의 탄압으로 감옥과 연금 생활, 타국 망명 생활 등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낼 때 이 여사는 그를 지극히 보필하며 일생을 보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협한 뒤 정권의 최대 공적으로 떠오르자 그때부터 이 부부는 온갖 고초에 시달렸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김 전 대통령이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며 납치·구금·연금이 이어지는 동안, 김 전 대통령에게 이 여사는 배우자·아내를 넘어서는 정치적 동지로 자리잡게 됐다.

1977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이 여사는 1년 가까이 석방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맡아야 했다.

이 여사는 ‘DJ의 정신적 동지’ 역할뿐 아니라 출중한 영어 실력과 서구식 매너 등을 십분 발휘해 제5공화국 당시 미국 망명 생활 중 세계 각지의 유력 인사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청년기때부터 쌓아온 재야·여성·기독교계 인맥 등을 바탕으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경을 확장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서울 동교동 자택 대문 옆에 지금도 나란히 걸려 있는 ‘김대중’ ‘이희호’ 문패는 두 사람의 ‘동업자’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또 이 여사는 1998년 김 대통령 취임 이후 ‘퍼스트레이디’로서도 역대 어느 ‘영부인’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면모를 선보였다.

여성부 창설, 청와대 여성 비서관 10명 입성, 모성보호 3법 개정, 여성 장관 4명과 첫 여성 대사 임명 등은 이 여사가 없었다면 추진되기 쉽지 않았을 일들이다. 그가 ‘여성운동가’로서 스스로 전문성을 가진 ‘독립적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퍼스트레이디의 단독 해외 순방을 개척했고 2002년에는 퍼스트레이디 최초로 유엔 아동특별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대통령과 북한을 동행 방문한 것도 최초 기록이다.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한국여성재단 발족(1999년), 결식아동 지원을 위한 사랑의 친구들 창립(1998년) 등도 그가 이슈를 주도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미국의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의 한국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꼭 10년이 된 올해, 장남 김홍일 씨와 이 여사가 잇따라 그의 곁으로 떠났다. 군부독재의 시대를 맨몸으로 맞서 싸웠던 이들 가족은 기나긴 고난의 시대를 헤쳐왔고, 그 과정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100세 가까운 평생에 걸쳐 헌신했던 이 여사가 있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 동지이자 가장 가까운 비판자 그리고 조언자 역할을 홀로 해내며, 김 전 대통령 별세 이후에도 동교동계와 재야 정치인들의 거목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타계 직전까지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대북 관계 형성에 힘써왔다.

평생을 사회에 헌신해 온 큰 별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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