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환 신부와 정일우 신부를 기억하며
지정환 신부와 정일우 신부를 기억하며
  • 정병욱
  • 승인 2019.04.16 16:29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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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임실치즈농협)
(사진 출처 : 임실치즈농협)

임실치즈의 개척자로 불리는 지정환 신부가 지난 13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각계 각층의 애도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전북 전주시 중앙성당에 마련된 지 신부의 빈소에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정환 신부에게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2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1931년 벨기에 브뤼셀의 귀족 가문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걷던 지정환 신부(벨기에명 디디에 세스테벤스)는 사제 서품을 받은지 2년째 되던 1959년 한국에 건너왔다.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한 세계 최빈국 한국과 지정환 신부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되어 부안성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한 지정환 신부는 가난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을 위해 30만 평의 땅을 간척하고, 이 땅을 간척 공사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분배해주며 신망을 얻었다.

이어 1964년 산골 마을인 임실성당에 부임해 임실을 치즈의 고장으로 개척한다. 산지 특성상 농사가 어려워 식량 자급에 문제가 있었던 임실 농민들의 가난을 보며 지 신부는 초원이 많은 임실의 특성을 활용하여 산양을 길렀고, 그 산양으로 산양유를 생산하여 치즈를 생산키로 하였다. 치즈에 대한 개념도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생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에만 매진했던 지정환 신부에게 치즈 제조에 대한 지식이 있을 턱이 없었다. 집에서 2천 달러를 얻어 무작정 치즈 공장을 설립하고 가난으로 희망을 잃어가던 마을 청년들을 끌어들였다.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산양유를 그저 굳히면 되는 줄 알고 처음엔 두부에 넣는 간수를 부었어요. 될 리가 없었죠. 약탕기도 사용해 보고 나중엔 간장이며 누룩을 넣어 온갖 시도를 해봤는데도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지정환 신부가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회고한 내용이다. 결국 고향인 유럽으로 돌아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치즈공장을 돌아다니며 치즈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한국 농민들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술이 필요하다는 지정환 신부의 간청에 이탈리아의 한 기술자가 감화받아 기술을 기꺼이 전수해준 덕분이었다. 극적으로 치즈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임실로 돌아온 지정환 신부는 실의에 빠져 있던 마을 청년들을 끌어모아 재차 협동조합을 구성해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임실에 부임한지 5년만인 1969년이었다. 

임실치즈는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서울의 호텔과 이태원의 외국인 상점들에서 지정환 신부의 임실치즈를 찾았다. 그렇게 임실치즈는 순항을 거듭하여 197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긴 명동 피자가게에 모짜렐라 치즈를 납품하기에 이른다. 경제성장에 따라 한국인의 입맛이 서구화되면서 임실치즈의 수요는 점점 더 늘어났고, 현재까지도 임실치즈는 연간 200억원의 매출액을 올리며 임실 지역경제의 핵심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가톨릭 사제로서 물욕이 없고 청빈했던 지정환 신부는 임실치즈가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한 1970년대 중후반 무렵 임실치즈의 소유권 전체를 마을 청년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에 넘겼다. 그리고 지정환 신부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악용하여 철권통치에 나선 시점에서부터였다. 

인민혁명당 사건 당시에서는 서울에 올라가 시위를 하다가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추방 위기까지 겪었다. 다행히 임실치즈로 농촌 경제 부흥에 기여한 점을 높이 산 박정희 정권의 선처 덕분에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사찰 대상이 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사찰을 받는 중에서도 지정환 신부는 지학순 주교 등 천주교 민주화 운동가들과 교류를 이어오며 한국 민주화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에서는 우유 트럭을 몰고 직접 광주로 가서 시민군에게 우유를 지원하기도 했다. 

열정적으로 한국의 농촌부흥과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고 싸우던 지정환 신부는 1981년 오른쪽 다리에 다발성 신경경화증을 앓게 되며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3년간 치료를 시도했지만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바람에 목발과 휠체어에 의존하게 된 그는 1984년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 가족'을 설립하여 중증 장애인들의 운동재활과 자립을 돕기 시작했다.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개념도 희박하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지개 가족은 수백 명이 넘는 중증 장애인들의 자활을 도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 신부는 2002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 자격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임실치즈의 창시자이자 경제발전의 수훈 갑인 동시에 민주화운동 유공자, 장애인 인권운동가 등 한국 현대사에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긴 지정환 신부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은 특유의 겸손함 때문이었다. 2018년 8월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어떤 언론과도 개인적인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방송 출연과 대기업의 홍보 대사 제안들도 단칼에 거절했다. 영웅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싫다는, 단지 사람들과 함께 했을 뿐이라는 태생적 겸허함의 발현이었다. 

이처럼 일생동안 무수한 업적을 남기고도 평생 낮은 자세로 베풀고 또 베푸셨던 지정환 신부가 선종 이후에 주목받는 모습을 보고 나는 또 한 사람의 외국인 영웅을 떠올렸다. 바로 복음자리를 만든 정일우 신부(미국명 존 빈센트 데일리)다.

정일우 신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내 친구 정일우' 포스터
정일우 신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내 친구 정일우' 포스터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고 1960년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한 정 신부는 1967년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되었으나 1972년 유신 반대 운동으로 학생들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눈을 떴다. 그리고 교수직을 사직하고 곧바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반독재투쟁을 하던 중 우연찮게 청계천 빈민들의 비참한 삶을 마주하게 된 정 신부는 청계천 야학교사로 일하던 고 제정구 의원과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으로 빈민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서울의 무허가 빈민촌을 무참히 정리했다.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의원은 한 순간에 집을 잃고 철거민이 된 빈민들을 모아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에 복음자리 마을을 만들었다. 복음자리 마을은 복음 자리인 동시에 보금자리였다.

지정환 신부가 임실을 치즈로 부흥시켰듯,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의원은 딸기잼으로 복음자리를 부흥시켰다. 유명한 복음자리 딸기잼의 시작이었다. 한 순간에 판자촌에서 쫓겨난 빈민들은 복음자리에서 자신들이 만든 잼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걸 보고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전 의원은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동시에 수상하였다. 

지정환 신부처럼 정일우 신부 또한 수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선종하기 바로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언론의 인터뷰 제안 또한 철저하게 거절했고,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남을 돕는데 애썼을 뿐이었다.

1998년 한국으로 귀화한 정일우 신부는 1999년 2월 일생의 동지였던 제정구 의원을 폐암으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농촌 청년의 자립을 돕는 누룩공동체를 운영하며 농촌운동에도 열성을 다했고, 2002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예수회 사회사도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14년 선종할 때까지 마포구 공덕동 빈민촌에 소재한 한몸공동체를 운영하며 도시빈민과 이주노동자, 약물청소년 등을 돕는데 애썼다. 2017년에는 이러한 정 신부의 헌신적 일생을 다룬 <내 친구 정일우>라는 독립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지난 4월 11일 여의도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린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우리는 35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3년간 전쟁을 치렀다. 71년 간 분단돼 남북이 서로 미워하고 대립하며 살았다. 지독한 가난과 잇따른 정변도 겪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력과 선진국 수준의 민주정치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5천만명을 넘는 ‘30-50클럽’의 일곱번째 나라가 됐다. 다른 여섯 나라는 모두 식민지를 두고 일찍부터 경제력을 키웠지만, 우리는 식민지배를 받다가 늦게 독립한 처지였다"며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의 비극,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세계 7대 경제강국으로 진입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회고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경제성장과 4.19혁명·부마항쟁·광주민중항쟁·6월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발전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의 두 축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선진국으로 도약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부지런하고 유능한 노동자들과 창조적인 기업인들과 테크노크라트로 불리는 우수한 관료들,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들의 공로가 매우 컸다. 

여기에 지정환 신부와 정일우 신부처럼 한국이라는 낯선 땅을 위해 평생 헌신한 외국인들의 공로 또한 지대했다. 1950년대 부산 영도의 피란민촌에서 자라며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문재인 대통령은 구호 물자를 나눠 주었던 외국인들의 천사같은 모습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타국의 원조 덕에 가난을 이겨내고 인권변호사를 거쳐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중심의 포용국가'를 모토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따뜻한 외교의 손을 내밀고 있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에 들어와 평생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고 지정환 신부와 정일우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푸른 눈의 선한 외국인들의 유지를 받들고 헌신에 보답하는 길. 그것은 문재인정부의 포용국가 외교정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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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davape 2019-04-18 11:31:28
두분 신분들과 이낙연총리님의 연설과 문프가 건설하고 싶어하는 신난방, 신북방 공동체의 중심에는 모두 사람이 중심인 민본주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유선복 2019-04-17 12:49:31
평소에 지정환 밤호박피자만 먹는 사람인데 정작 지정환신부님이 외국인이었다는 것도 몰랐네요.
복음자리 딸기잼도 창업주가 기독교인인가보다 하고 먹었었어요.
이젠 더 감사하면서 먹게 될 것 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하루빨리 뉴비씨가 포털 진입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좋은 기사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kuckkoo 2019-04-17 10:04:05
개인적인 종교와 종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정일우 신부 같은 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종교인 이라 생각합니다.

조경숙 2019-04-16 23:00:57
감명깊은 기사 잘 봤습니다.
건방떨지않고 겸손한 자세의 국민이 되면
좋겠습니다.

피부짱 2019-04-16 17:41:39
미처 몰랐던 두분의 고귀한 영혼에 대해 알려주어 감사합니다

이동림 2019-04-16 17:08:0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수 있음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문프의 포용 외교정책까지 연결해줘서 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