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세이(院政, 원정) 3편 : 파국으로 가는 막장 드라마
인세이(院政, 원정) 3편 : 파국으로 가는 막장 드라마
  • 정재웅
  • 승인 2019.05.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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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⑮ 유명무실해진 율령제, 엉망진창 된 덴노 계승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주제로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인세이(院政, 원정) 1편 : 고산조가 간신히 정비한 율령제를 그 아들이 흔들다

인세이(院政, 원정) 2편 : 시라카와 법황의 강대한 권세

시라카와 법황의 통치는 분명 셋칸케인 후지와라 가문을 비롯한 귀족들의 장원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정리했고, 덴노 계승을 좌우할 정도로 강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의 전횡을 억제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 성과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 정치를 펼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기관이 조정이 아니라 ‘인’이라는데 있다.

인이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하면서 권력과 부가 인에 집중되었고, 자연스럽게 조정이 무력화되었으며 율령제에 근거한 통치가 아닌 시라카와 법황의 자의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져 율령제가 붕괴되고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더해 불교에 심취했던 시라카와 법황이 당시 승병을 거느리고 위세를 떨치던 사찰에 장원을 기진(寄進:물품을 기부하여 바침)하거나 혹은 새로운 사찰을 건립했기에 그 과정에서 인과 조정의 재정 지출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의 장원 못지않게 폐해가 큰 사찰의 장원은 거의 개혁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생각해보면 센고쿠 시대 잇코잇키(一向一揆, いっこういっき)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불교를 탄압한 데 모두 역사적, 제도적 맥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라카와 법황은 인세이를 하며 후지와라 셋칸케와 밀접했던 무사(사무라이) 씨족 카와치 겐지(河内 源氏)를 경계하여, 이들과 경쟁하던 무사 씨족이었던 이세 헤이지(伊勢 平氏)를 중용했다.

시라카와 법황의 비호 아래 타이라 가문은 호쿠멘노부시(北面の武士)로 복무하며 무력이 필요한 곳에 개입하는 한편 장원과 상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인에 기진하며 세력을 키우게 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무가정권이 등장하는 근간이 된다.

비록 시라카와 법황 본인은 강대한 권력을 누렸지만, 그가 사망한 후 인세이의 문제점은 덴노 가문의 분열로 폭발하게 되었다.

1123년, 시라카와 법황은 아들인 도바 덴노(鳥羽 天皇)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그 결과 도바 덴노의 아들이자 시라카와 법황의 손자인 아키히토 친왕(顕仁 親王)이 덴노로 즉위하니 이가 스토쿠 덴노(崇徳 天皇)다.

도바 천황(왼쪽)과 그 아들이자 후임자인 스토쿠 천황은 부자관계이지만 서로를 싫어했다.
도바 천황(왼쪽)과 그 아들이자 후임자인 스토쿠 천황은 부자관계이지만 서로를 싫어했다.

시라카와 법황이 살아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 억지 양위는 1129년 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인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나자 거리낄 것이 없어진 도바 조우고는 인세이를 행한다.

토바 조우고의 이러한 인세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는데, 도바 조우고 본인이 제대로 된 통치가 아니라 자신의 장원을 확장하고 부를 축적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하여 시라카와 법황의 정책으로 간신히 억제된 귀족의 대토지 겸병을 다시 시작되었고, 이에 더해 인의 무력으로 복무하던 겐지나 헤이지 등 부게(무사 가문)까지 자신들의 장원을 확장하는데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쯤 되면 사실상 율령제는 유명무실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토쿠 덴노를 싫어한 도바 조우고와 그의 총비인 후지와라노 도쿠시(藤原得子)가 덴노 계승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데 있다.

도바 조우고는 총비인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황자를 낳자 이를 덴노로 즉위시키기 위해 스토쿠 덴노에게 2살 밖에 되지 않은 동생을 황태제로 삼았다가 양위하게 했다.

결국 스토쿠 덴노는 강제로 퇴위당하고 나리히토 친왕(体仁 親王)이 덴노로 즉위하니 이가 고노에 덴노(近衛 天皇)다.

역시 인이 된 스토쿠 조우고는 원래대로라면 통치를 해야 하나 인세이는 덴노의 아버지가 하는 것이었기에 동생에게 양위한 스토쿠 조우고는 할 수 없었다.

병약한 고노에 덴노는 1155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당시 고노에 덴노는 스토쿠 덴노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 親王)을 양자로 맞아들였기에 원래대로라면 그가 즉위하고 스토쿠 조우고가 인세이를 펼쳐야 했다.

하지만 스토쿠를 싫어한 도쿠시는 자신의 양자이자 자신의 친딸과 결혼하기로 한 모리히토 친왕(守仁 親王)을 옹립하려 했다.

77대 고시라카와 천황(1127~1192). 그의 시호는 증조부 시라카와 천황을 본 뜬 것이다.
77대 고시라카와 천황(1127~1192). 그의 시호는 증조부 시라카와 천황을 본 뜬 것이다.

그러나 모리히토 친왕은 당시 너무 어렸기에 장성하여 덴노가 될 때까지 “어디까지나 징검다리로” 모리히토의 친아버지인 토바 조우고와 중궁 쇼시의 4남 마사히토 친왕(雅仁 親王)이 태자 책봉도 없이 덴노로 즉위하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 天皇)다.

이 고시라카와 덴노의 연호가 바로 호겐(保元)이니, 덴노와 조우고의 갈등이 폭발하고 이에 후지와라 셋칸케와 겐지와 헤이지가 모두 덴노파 혹은 조우고파로 양분되어 벌어지는 ‘호겐의 난(保元の乱)’이 고시라카와 덴노 치세에 발발하는 사건이다. 

후지와라 셋칸케의 세도를 약화시키고 덴노와 조정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시작된 인세이가 결국 역설적으로 덴노와 조정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무가정권이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호겐·헤이지의 난’ 합전도 병풍
‘호겐·헤이지의 난’ 합전도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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