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가문 4편 - 고산조 덴노 ‘엔큐의 선정’
후지와라 가문 4편 - 고산조 덴노 ‘엔큐의 선정’
  • 정재웅
  • 승인 2019.04.1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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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⑫ 농민 수탈과 사무라이의 등장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주제로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2015년에 발간된 역사 만화책 『헤이안 인물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편』 표지
2015년에 발간된 역사 만화책 『헤이안 인물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편』 표지

헤이안 시대 일본을 사실상 통치한 후지와라 가문 집정 중에서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는 단연코 독보적인 존재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덴노를 능가하는 권위와 권력을 지녔기에 덴노를 마음대로 핍박하는가 하면 동궁을 마음대로 바꿀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수도인 헤이안쿄에 화재가 나서 황궁인 다이리(内裏)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저택인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가 모두 불에 탄 일이 발생했는데, 귀족들과 지방관들 모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저택 재건에만 관심을 갖고 물품을 바치는 일도 있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누가 덴노이고 누가 신하인지 구분조차 어려울 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다이죠다이진(태정대신), 셋쇼(섭관), 간바쿠(관백)에 오를 수 있는 셋칸케(摂関家)로서 훗날 형성된 고셋케(五摂家, 5개 섭가) 역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인 미도류(御堂流)에서 이어진다.

즉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당대 자신의 위세뿐만 아니라 이후 일본 쿠게(공가公家, 부게(무가武家)와 대비되는 조정의 귀족 가문)의 수장으로서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를 세운 인물이다.

실로 걸출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후지와라 가문 세도의 몰락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부터 시작된다는 거다. 

사무라이, 즉 무사계급이 처음 등장한 것은 헤이안 시대였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한 장면.
사무라이, 즉 무사계급이 처음 등장한 것은 헤이안 시대였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한 장면.

본래 헤이안 시대 일본의 지방관제는 각 쿠니(国, 국, 율령으로 선포된 66국. 이름은 쿠니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도나 중국의 주와 유사한 개념)에 지방장관인 고쿠시(国司국사)를 두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것이었으나, 여러 혼란을 거치면서 고쿠시가 상당한 자율을 갖고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조정은 고쿠시가 중앙으로 계획된 조세를 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지방의 민생은 도외시했다.

이 상황에서 고쿠시는 수취를 증가시켜 자신의 부를 증가시킬 유인이 있었고, 이는 농민의 유리와 빈번한 지방 반란을 야기했다.

즉 과도한 수취를 버틸 수 없는 농민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거나 혹은 도적이 되거나 혹은 사찰이 들어가 승려가 되거나 혹은 자신의 토지를 조정의 유력 가문(주로 후지와라 가문)에 바치고 해당 장원을 관리하는 장관이 되었다.

이 중 장관이 된 부유한 농민들은 자신들이 담당한 장원을 도적과 승병과 고쿠시로부터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무사 계급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다.

하여튼, 이러한 농민의 토지로부터 유리는 빈번한 지방 반란과 연력 연간부터 센고쿠 시대까지 이어지는 승병의 문제를 야기했다.

빈번한 지방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은 겐지나 헤이지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의 장군으로 파견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 고쿠시와 겐지나 헤이지의 수장이 결탁하여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간사이의 헤이지와 간토의 겐지가 이러한 대표적 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집권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조정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조세제도와 장원 제도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일본 전역에 걸친 장원의 최대 소유자가 후지와라 가문인 상황에서 이러한 개혁정책이 통하지 않음은 명약관화하다.

장원 제도 모순의 증대와 무사 가문의 등장은 호겐의 난과 겐페이 합전(源平合戦, 당대 제일의 무사 가문인 겐지와 헤이지 간 쟁패)을 거쳐 무가정권이 수립되어 덴노뿐만 아니라 조정 전체가 허수아비가 되는 원인이 되는데, 이건 나중 이야기다.

13세기 무사계급의 생활상을 다룬 역사교재
13세기 무사계급의 생활상을 다룬 역사교재

결국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당대 절정의 권위와 권력을 누렸지만 자신의 가문과 헤이안쿄 조정이 쇠퇴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는 다시 고산조 덴노의 즉위와 연결된다.

1068년, 고레이제이 덴노(後冷泉 天皇)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덴노위는 그의 동생이 이어받았으니, 이가 바로 고산조 덴노(後三條 天皇)다.

거의 300년 동안 이어진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정치는 그 근간을 외척으로서 후지와라 가문의 지위에 두는데, 고산조 덴노는 어머니와 부인 모두 후지와라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후지와라 가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고산조 덴노는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방계 출신의 후지와라 귀족, 무라카미 겐지 같은 신적강하한 귀족, 그 밖의 하급 귀족을 중용하여 외척의 자리에서 밀려난 후지와라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들로 후지와라 본가의 당주이자 간바쿠였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賴通)는 은거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당주 자리를 놓고 분쟁을 벌인 까닭에 고산조 덴노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고산조 덴노는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으로 칭송받는 개혁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는 난립한 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였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한 개혁이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장원제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가 재정이 건전해졌으며, 후지와라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약화되었다고 해도 오랜 시간 축적된 후지와라 가문의 장원은 막대하였기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덴노들이 후지와라 가문을 경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타이라 가문은 이와 같은 덴노의 경계심 덕에 황가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다이죠다이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등장하게 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다. 

고산조 덴노
고산조 덴노

하지만 아쉽게도, 역사에 나타나는 많은 개혁정치가 그러하듯이, 고산조 덴노의 개혁은 당대에서 끝나게 된다.

고산조 덴노 사후 덴노위는 역시 그의 아들이자 셋칸케가 어닌 후지와라 가문의 외손인 시라카와 덴노(白河 天皇)로 이어지는데, 이로 인해 덴노의 권위와 율령제에 근거한 통치는 다시 추락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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