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⑪ 추강 김지섭·학우 김시현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⑪ 추강 김지섭·학우 김시현
  • 조시현
  • 승인 2019.04.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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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봉창 의사에 앞서 일제 심장 왕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추강 김지섭 선생
의열단 창단 멤버로 숱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최후의 레지스탕스' 학우 김시현 선생

지난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은 1923년에 있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일제 경찰이던 황옥이 1920년에 의열단원 김시현을 만나 의열단원이 된 후,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중국 톈진으로 향했고 이곳에서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을 만났다.

황옥은 김원봉으로부터 일제 주요기관과 요인ㆍ친일파를 암살하는 작전을 위해 의열단 단원과 함께 고성능 폭탄 36개와 권총 5개를 경성까지 운반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에 황옥은 김시현, 권동산, 김재진 등과 함께 단둥, 신의주를 거쳐 경성까지 폭탄을 운반했으나 김재진이 일본 경찰에 밀고하면서 모든 작전이 발각되고 작전에 투입된 황옥을 포함해 1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검거된 사건이 바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의열단원의 핵심 인물 2명이 등장하는데 바로 추강 김지섭 선생과 학우 김시현 선생이다.

● 일제 심장 황궁에 폭탄을 던지다
추강 김지섭 선생은 1884년 경북 안동의 오미마을에서 아버지 김병규(金秉奎)와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 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오미마을은 풍산김씨(豊山 金氏)들이 500년 동안 세거해 온 씨족마을로, 안동의 다른 마을 못지 않게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단식으로 순절한 김순흠, 상해 임시정부 법무차관을 지낸 김응섭,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했던 김재봉,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총영사를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 등 기록에 남아있는 독립투사만 24명이나 된다.

이런 마을에서 자란 추강 선생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더욱 그것이 잘 들어난다. 추강 선생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 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던 중,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되자 자신도 공직을 분연히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김시현을 통해 김원봉·곽재기를 만나 조국독립 운동방략에 대해 숙의했다.

이후 1923년에 만주로부터 폭탄 36개(대형 6개 : 건물파괴용, 소형 30개 : 대인살상용)를 김시현·유석현 등과 함께 일부는 신의주로 반입시켰고, 나머지는 의열단에 입단한 황옥이 직접 서울로 운반했으나,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됐다.

김시현·유석현·황옥 등은 체포됐으나, 추강 선생은 무사히 만주로 탈출했다.

이후 1924년 동경에서 제국의회(帝國議會)가 개최되고 이때 일제 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함께 조선 총독이 참석한다는 것을 신문보도를 통해 입수하게 되고, 이에 추강 선생이 자원해 일본으로 향했다.

1924년 1월 5일 새벽에 도쿄에 도착한 김지섭 의사는 제국의회가 잠정적으로 연기되었다는 신문보도를 읽고, 고민 끝에 결국 일 왕궁에 직접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일 왕궁은 경비가 워낙 삼엄해 거사가 쉽지 않았지만, 추강 선생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제지하는 일본 경찰을 제치고 급히 폭탄 3개를 던졌지만 모두 불발되며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사건의 현장이자 왕궁의 정문으로 통하는 다리의 명칭이 ‘니주바시(二重橋)’인데, 그래서 의사의 의거를 ‘니주바시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일제에 의해 체포돼 재판으로 넘겨진 추강 선생은 일본 법정에서 자신은 잘못한 바가 없으니 ‘사형 아니면 무죄를 선고하라’고 당당하게 외쳤지만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4년이 흐른 1928년 2월 20일, 일제는 추강 선생의 형량을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낮추었지만, 선생은 차디찬 옥중에서 뇌일혈로 향년 44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의사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일인 변호사 등이 앞장서서 사인을 규명하며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미 화장을 해버린 후였다.

의사의 부고장을 받은 김탁이 의사의 친동생 김희섭에게 전달해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왔으며, 고향 안동의 오미리에 안장했으나 당시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봉분도 못하고 평장을 한 상태로 있었다.

광복 후 사회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을 치룬후 예천군 호명면 대지동에 이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윤봉길·이봉창 의사에 앞서 일제의 심장인 왕궁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된 우리 동포들의 원혼을 달래려했던 이가 바로 추강 선생이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당시 일제는 간담이 서늘했으리라.

실제로 추강 선생의 거사 후 일제는 이 사건으로 내무차관을 견책하고, 경시총감·경무부장 등을 즉각 파면하는 등 경찰 수뇌부를 경질시켰다.

아울러 검사총장이 직접 경찰서에 나가서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엄중한 취조를 했다고 한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추강 선생이 일본으로 밀항하던 배에서 지은 한시에는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萬里飄然一粟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舟中皆敵有誰親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崎嶇世路難於蜀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忿憤輿情甚矣秦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今日潛踪浮海客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昔年嘗膽臥薪人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此行己決平生志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不向關門更問津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 선생의 기개 앞에 절로 고개가 떨구어진다.

● 최후의 레지스탕스라 불리운 사나이
학우 김시현 선생은 영화 ‘밀정’에서 주인공 공유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1운동 이후의 행적에 대해 기록이 남아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학우 선생은 3·1운동 직후 바로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의열단 창단 멤버인 셈이다.

1922년 김규식·여운형 등과 같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혁명단체대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후,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의 파괴, 일제요인의 암살 등을 계획하고 경기도 경찰부의 황옥과 함께 거사하려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1929년 다시 만주로 망명해 길림에서 독립동맹을 조직, 활동하다가, 1931년 북경에서 잡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돼 5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또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2년 북경의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잡혀 투옥됐다.

1945년에는 일본헌병대에 잡혀 수감됐다가 광복으로 석방됐다.

광복 이후 귀국해 고려동지회 회장, 전보통신사 회장을 역임했으며, 민주국민당에 입당해 고문으로 있다가 1950년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52년 대통령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됐으며, 같은 해 경북 안동에서 민의원 의원에 당선됐고, 5·16군사정변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6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이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다.

1952년 6월25일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는 ‘6·25멸공통일의날’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 도중 단상 뒤 VIP석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 대통령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거리는 불과 3m 남짓, 하지만 탄환 불발로 저격은 실패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의열단 출신 류시태였다.

62세의 류시태는 민주국민당 소속 김시현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류시태와 김시현은 같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두 사람은 일제 때부터 의열단원으로 상하이를 비롯해 해외 각처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했다가 10여년의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류시태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 사실상 암살 사주 혐의로 김시현 의원 역시 체포됐다. 이때 부산은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위한 ‘발췌 개헌’을 추진하면서 정치파동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두 달 뒤인 8월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저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에서 김시현은 암살시도 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당시 학우 선생은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고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 국방장관을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시현은 자신은 30년간 조국광복을 위해 살인·파괴를 해 온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70세의 노인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정한 기력으로 명쾌하게 응수했다고 전한다.

훗날 4·19혁명 이후 석방되면서 류시태는 “그때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그 때문이였을까? 학우 선생은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최후의 레지스탕스’이다.

일제시대에는 목숨을 걸고 일제와 맞서 싸웠고, 해방 후에는 민족의 정기를 해치려 하는 세력을 향해 목숨을 걸고 총부를 들이댔던 학우 김시현 선생.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를 의열단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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