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⑩ 학산 김남수 선생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⑩ 학산 김남수 선생
  • 조시현
  • 승인 2019.04.05 19:0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운동가 계(系)의 이단아, 지주 출신으로 소작운동에 앞장선 사회주의자
퇴계 수제자의 후손으로 도산서원 철폐운동의 큰 죄(?)를 짓고 지워져버린 흔적들
경북 안동시 와룡면의 군자마을 전경

경북 안동의 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유난히 독특한 분이 있다.

본인은 이름 있는 명문가의 후손이자 지주 출신인데, 이를 부정하고 소작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계의 이단아 같은 분이 있다.

바로 안동 군자마을 출신의 학산 김남수 선생이다.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 예안파의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초기 입향조인 김효로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김효로는 슬하에 아들 김연과 김유를 뒀는데, 김연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갔고 김유는 형을 대신해 고향을 지키며 가풍을 확립했다.

이후 김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퇴계 이황과 가까이 지내면서 아들들을 보내 가르침을 받게했다. 김연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효로의 손자 김부필·김부의·김부인·김부신·김부륜과 외손자 금응협·금응훈 등 이들 일곱 종형제는 모두 훌륭한 학자로 성장해 ‘오천 칠군자’로 불렸다.

이곳에서 당대의 도학군자가 줄줄이 나오자 정조 때 안동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이 마을을 둘러본 후 예안 읍지인 ‘신성지’에 “오천 한 동네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탄하는 글을 남겨 군자마을로 불리게 됐다.

그러니 이 마을 출신들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퇴계 선생 제자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후손 중 한 명이 일제시대 당시 소작운동을 주도하며, 심지어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있는 도산서원 철폐운동에 앞장섰으니 집안에서 버림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안동의 명문가들은 서로 혼맥으로 얽혀 있는데다 대부분이 퇴계 선생 제자의 후손들이니, 안동 사회에서 봤을 때 학산 선생은 엄청나게 큰 죄를 지은 셈이다.

● 독립운동가 계의 이단아
학산 김남수 선생은 1899년 안동시 예안면 군자리 탁청정 종손 김영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유인식과 김동삼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와 서울 중동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안 3·1운동에 참여한 김남수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 들었다.

1920년 가을에 유인식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김남수의 사회운동이 시작됐다.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다가 상경해 동향 출신인 김재봉·권오설·이준태 등과 무산자동맹에서 활동하며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6월 경성공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 동맹파업의 전말’이란 보도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돼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1923년 11월에 안동으로 내려와 양반지주 출신들인 이준태·권오설·안상길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해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1924년 이후 안동지방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김남수는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인물이 됐다.

그리고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 그 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남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8월 9∼10일 이틀 동안 친일·극우 인물들이 형평사예천지회 사무소를 파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켰는데, 이 때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상세하게 그 전말을 연일 보도해 형평사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안동청년연맹의 임시의장으로서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청년데이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연장선에서 1925년 10월에 안동노우회를 결성했는데, 여기에서 학산 선생은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또 1925년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했다.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어려운 옥살이를 참아냈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위조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돼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광복을 맞기 직전에 사망했다.

● 잊혀진 이름이 되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을 한 경력과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했다는 괘씸죄(?)로 집안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돼 버렸다.

특히나 학산 선생의 직계 조상인 탁청정 김유는 퇴계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분이었으니, 가문에서 학산 선생을 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을 지도 모른다.

이후 학산 선생에 대한 기록과 흔적은 지워졌고, 외부 기록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아 학산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집안 후손들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필자는 학산 선생의 후손을 찾기 위해 여러 날을 수소문 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군자마을 출신의 다른 후손으로부터 그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후조당 출신으로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김기원 씨는 “탁청정은 작은집인데, 대학에서 배우기 전까지 독립운동가가 집안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며 “자라오면서 집안 어른 그 누구로부터도 학산 선생에 대해 언급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한 것이 큰 죄를 지었다고 판단한 게 아니겠느냐”며 “그래도 뒤늦게나마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게 돼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학산 선생은 지난 2005년이 돼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군자마을에 세워졌으나 주차장의 구석에 외롭게 서 있어, 아직도 그의 신원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지숙 2019-04-06 07:58:23
기자님 덕분에 잘 모르던 독립운동가를 많이 알게 되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