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⑨ 막난 권오설 선생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⑨ 막난 권오설 선생
  • 조시현
  • 승인 2019.03.29 18:4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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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린 경북 안동 가일마을
6·10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6·10 만세운동은 3·1운동과 함께 일제시대 최대의 대일항쟁운동으로 꼽힌다.

1926년 6월 10일,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날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처음 기획된 것처럼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시 장례식에 많은 민중이 참배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계기로 3·1운동과 같은 대일항쟁운동을 유발하고자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 제국주의 일본이다. 이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라는 내용의 격문과 태극기까지 준비했었다.

거사 당일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0여명이 운구행렬이 지나는 서울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1천여 장의 격문을 살포했다.

을지로와 종로3가, 동대문, 청량리에서도 학생들이 교육·토지제도의 개혁, 일본제국주의 타도, 8시간 노동제 채택 등을 외치며 시위했다.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이에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조선총독부는 서울에만 경찰과 군인 7천여 명을 동원해 진압했으며, 6·10 만세운동으로 학생 1천여 명이 체포됐다.

이후, 울산·평양·홍성 등 전국 각지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이어지기는 했으나 당초 계획만큼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또한 광복 이후에도 6·10 만세운동은 그 내용이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 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도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다.

비록 사전에 발각돼 3·1운동과 같은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고려공산청년회가 지도하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한 학생들의 시위에 머무르긴 했지만, 6·10 만세운동의 의의는 독립운동사에 있어 재평가돼야 마땅할 것이다.

● 6·10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바로 6·10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경북 안동 가일마을 출신의 권오설이다.

권오설은 1897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막난(莫難)으로, 어렸을 때의 호(아호)는 오서(五敍)이며, 권일(權一)·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이라고도 불리었다.

훗날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을 지낸 권오직이 그의 동생이다. 둘째 동생 권오기 또한 해방 후 안동 풍산면의 노동조합장을 지내다가 곧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권오설은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중 동기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해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이후 광주로 내려가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시위 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복역했으며, 석방 후 귀향해 안동군 일직면 일직서숙(一直書塾)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1920년 안동청년회에 가입했고, 안동의 풍산소작인조합을 지도했다.

1923년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 및 북풍회와 연관이 있는 화성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김단야·신철수 등과 함께 마산에서 조선공산당 마산지부 창당준비를 지도했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이 됐으며, 12월에는 박헌영 등 고려공산청년회 지도부 다수가 체포되자 제2대 책임비서에 올랐다.

1926년 4월 박래원·민창식 등과 함께 6·10만세사건을 계획했으나,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됐다.

그러던 중, 출옥 100일을 앞둔 1930년 4월 17일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 채 순국했다. 하필 그 날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립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의 장례는 쉽게 치룰 수 없었다. 그의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우려한 일제 경찰이 출입을 막아 장례는 가족들만으로 쓸쓸하고 참담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봉분도 높게 올리지 못하게 해 그의 무덤은 선영이 아니라 가일마을 부근의 풍산들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난 2008년에서야 선영에 잠들게 됐다.

당시 이장을 위해 묘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그의 관이 철제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 일제가 고문을 숨기기 위해 그의 시신이 든 관을 열어보지 못하도록 함석철판으로 밀봉한 채 가족들에게 건네줬다고 전해졌던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철제관은 현재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권오설은 오랫동안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됐다가 2005년이 돼서야 이웃 오미마을의 김재봉과 함께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또 그의 사후 88년만인 지난해가 돼서야 그의 고향 땅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서라도 열리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할 것이다.

● 월북 인사만 수십 명, 그래서 붙여진 이름 ‘한국의 모스크바’
그가 태어난 가일마을은 안동 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성촌으로, 본래 전통적인 양반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에는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었는데, 1420년경에 권오설의 직계조상인 참의공 권항이 이 마을 출신의 류서에게 장가들면서 이 때부터 안동 권씨 일족 또한 세거하게 됐다.

권오설을 따른 이 마을 출신 집안 청년들 중 권오상(1900~1928)과 권오운(1904~1927)은 각각 6·10 만세운동 때 구속된 뒤 각각 1928년과 1927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했다.

당시 권오설마저 1930년에 옥사해, 한 문중의 세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셈이다.

‘모스크바 동네’라 불릴 만큼 가일마을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들 수는 어마어마하다.

우선 조선노동총동맹 중앙 집행위원을 지낸 안기성(1898~?)도 가일 출신이다. 그는 해방 후 월북, 한국전쟁 중 유격대 제7군단 이른바 ‘남도부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나 1953년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권오설의 막내 동생 권오직(1906~1953)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일제 때 두 차례나 구속돼 복역하다 해방 후 출옥했다.

이후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다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중국 대사 등을 거쳤으나 전쟁 직후 안기성과 같은 시기에 숙청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외에도 해방 후 안동에서 치안유지회 간부로 활동한 권오헌, 강동정치학원 1기생으로 학가산 유격대를 이끌던 권영남 등이 있다.

그 밖에 독립운동 기록이 남아 있는 이들로는 권각(1923~1943), 권영달(1901~1945), 권영식(1894~1930), 권오상(일명 오돈, 1900~1928), 권오운(1904~1927), 권오직(1906~?), 권오헌(1905~1950), 권재수(1882~?), 권준표(1894~1953), 권준희(1849~1936), 권준흥(1881~1939), 권혁수(일명 재탁, 1926~?) 등 12명의 독립운동가가 기록 상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 마을 출신으로 기록되지 않은 약 30여 명의 월북자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이 마을 후손들은 그간 얼마나 숨죽여 살았을지 짐작이 간다.

● 모진 세월을 숨죽이며 버텨온 후손들
권오설의 후손인 권대용 씨는 지난 세월에 대해 “손가락질 받으며 버텨 온 세월”이라고 회고했다.

권 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구빨(옛날 일제시대 빨갱이)’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며 살았다”며 “그래서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래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 참 많았는데 지난 2005년도에 훈장을 준다는 연락을 받고 잘 버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훈장을 받는데 가슴에 맺힌 것이 탁하고 올라오더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권 씨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받친 것을 두고 좋고, 나쁘다고 나눌 수 없는 거잖아요?”라고 반문하며 “근데 우리는 아직도 좋고, 나쁘다고 나눠 평가하잖아요”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이건 진정한 해방이 된 것이 아니다”라며 “친일파만 해방된 거라고 본다. 독립운동한 사람한테는 해방된 것이 아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기자의 등 뒤로 들려오는 “고향이지만 고향에 살 수 없었다”는 노인의 눈물 섞인 말이 가일마을 앞에 펼쳐진 논을 물들이는 노을 같았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은 권오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김 관장은 “마을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않는 조상인 병곡 권구도 권오설을 자랑스런 후손으로 여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제라도 그 평가에 걸맞을 수 있게끔 가일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돌아보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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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사 2019-04-03 16:55:01
"고향이지만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마음아픈 역사입니다..

곤지암 2019-03-31 09:54:18
들렸다 갑니데이~

웰컴퓨터 2019-03-30 16:24:17
몰랐던 찢겨진 역사의 한 부분이네요.
분단으로 말미암아 반쪽짜리 역사를 가진 나라가 되어 버렸군요.
슬픈현실입니다.

박성우 2019-03-29 21:03:14
좋은 기사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독립운동의 별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