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⑧ 허형식 장군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⑧ 허형식 장군
  • 조시현
  • 승인 2019.03.22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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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합군 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역임
공산당 경력과 후손의 월북으로 인해 범산 가문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인물

이육사는 자신의 시 「광야」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많은 문학교과서에 실린 작품으로 일제하의 절망적 현실과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염원하는 의지와 시정신을 기조로 시적 기교의 극치를 보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천고라는 표현의 시간적인 무한성과 광야라는 공간적인 광막함이 시의 느낌을 다소 거칠고 남성적이게 한다고 배운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초인’은 조국의 광복을 실현하고 조국의 역사를 찬란히 꽃피울 존재, 이상적 구원자라고 흔히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나 최근 이 ‘초인’이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초인’의 실제 주인공은 바로 이육사의 어머니의 사촌동생인 허형식이다.

근현대사에 관해 많은 기사를 써 오고 있는 박도 기자는 지난 2016년 소설 ‘허형식 장군’을 출판하며 “처음에는 평전을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자료가 너무 부족하고 사료 확인이 어려운 것이 많아서 소설로 장르를 변경했다”며 “허형식 장군에 대해 나중에 작가나 역사학자들이 허형식 장군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한 조각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바로 허 장군이 싯구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했다.

● 범산 가문의 아픈 손가락

앞서 경북 구미의 명문가로 소개한 범산 허형 가문에서 허형의 조카가 바로 허형식이다. 범산의 동생인 시산(是山) 허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랐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1930년부터 보이는데, 1930년 하얼빈에서 일본 총영사관을 맨손으로 급습해 1년간 수감됐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1934년 6월 28일 주하유격대를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재편성하게 되자 제3단 정치위원에 임명됐으며, 그 해 가을에 제1대대 대대장이 됐다.

1935년 1월 합동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사로 편성되자 제2단(연대)장이 됐으며, 3월 일본군의 춘기토벌에 대항해 유수하자(柳樹河子) 전투, 소량수하자(小亮水河子) 전투에 참가했다.

1936년 초 인민혁명군 제3군 제3사 징치위원이 되었고, 9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北滿臨時省委員會)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이 된 후, 1937년 2월 동북항일연군 사령부에서 의동지구 여러 군단의 단결과 합동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를 결성하자, 사무처 주임이 됐다.

6월 항일연군 제9군 정치위원이 됐고, 겨울에 항일연군 제9군 제3사 사장으로서 해륜현(海倫縣)·영안현(寧安縣) 등지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1939년 1월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 겸 눈해지구대표단(嫩海地區代表團) 부지휘, 용남지휘부(龍南指揮部) 책임을 맡았으며, 동북항일연군 제 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했다.

4월에는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에 임명됐으며, 1940년 봄 제3로군 제12지대 정치위원이 되었고 9월 풍락진(豊樂進)전투에 참전했다.

1941년 일본의 토벌에 맞서 항일연군 제9·12지대에서 유격활동을 계속하던 중 이듬해인 1942년 8월 3일 북만주 경성현(慶城縣)에서 전사했다.

당시 그는 동북항일연군의 유일한 남한 출신 지휘관으로 300여 회 전투를 통해 27개 도시를 점령하고 일본군과 경찰 1557명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망 당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는데, 일본군은 그의 머리만 떼어가고 시신은 벌판에 그대로 방치해 들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해 다리 한 쪽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 북으로 간 후손
허형식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다고 한다. 둘 모두 해방 전후로 월북해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범산 가문에서도 허형식과 그 자식들에 대한 언급은 일종의 금기사항이었다.

범산의 장손인 허경성 씨는 “그래도 같은 핏줄인데 어찌 허형식의 아들·딸에 대해 궁금하지 않겠느냐”며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고 말했다.

허 씨는 “허형식의 아들이 나보다는 아래 연배지만 살아 있는지도 궁금하고 살아 있다면 꼭 보고 싶다”며 눈물을 훔쳤다.

범산 가문도 석주 가문이나 백하 가문처럼 집안 식구 모두가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가문의 일원 중 월북한 사람이 있다 보니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고, 독립유공자로 대우받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범산의 가문에서는 바로 허형식이 그렇다. 범산 가문의 아픈 손가락이 바로 허형식 장군이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며 지휘관 자리까지 올랐지만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후손들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는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이 돼 버렸다.

한국사학회장을 지낸 바 있는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는 허형식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강 교수는 “만약 허형식 장군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이 분은 북녘 아니면 남녘에서 정권을 잡았거나 통일정부를 세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근현대사기념관 관장을 지낸 이준식 관장은 “개인적으로 꼭 포상해야 할 사람은 바로 허형식”이라고 꼽은 적이 있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만주 무장투쟁은 독립군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별로 없다보니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며 “나중에 귀국한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일제 밀정의 정보문서가 발굴되지만 무장투쟁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 항일무장투쟁 지휘관의 생가터과 독립군 토벌대 출신 전 대통령의 생가터
경북 구미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가 있다. 최근 공원화 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생가 주변의 도로는 ‘박정희로’로 불리고 있고, 옆 동네에 있는 구미시립체육관은 ‘박정희 체육관’이라고 공식명칭이 돼 있다.

박정희 생가에서 조금 내려오면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데, 그 철길 건너편 어딘가에 허형식의 생가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생가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박정희 생가에서 허형식 가문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관인 왕산기념관으로 걸어가는 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지휘관의 생가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친일논란으로 시끄러운 전 대통령의 생가터는 공원화돼 있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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