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⑦ 범산 허형 가문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⑦ 범산 허형 가문
  • 조시현
  • 승인 2019.03.19 19:2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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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14명을 배출한 경북 구미의 명문가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경북 구미에 대한 첫인상을 물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릴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위치한 동네라는 이미지 때문에 보수의 진원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경북 선산(구미의 옛 지명)은 일제시대 당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흔적은 많이 사라지고 박정희 이름만 남아있다.

지난 6편에서 이육사의 외가를 언급했다. 바로 범산 허형의 가문이다. 이 집안에서는 독립운동가만 14명이 나왔다.(2019년 3월 현재 서훈 받은 사람 기준)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집안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이육사의 어머니인 허길 여사의 집안 조카인 허은 여사는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인 이병화와 혼인했다.

또 석주의 손녀 이후석 여사는 서간도로 이주한 뒤 그곳에 도피해 있던 의병장(왕산 허위, 허형의 사촌동생)의 아들 허국과 결혼했다. 석주 가문과 범산 가문은 겹사돈을 맺은 셈이다.

독립운동가 집안끼리 혼인으로 연결된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을 했던 가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육사의 외가인 범산 가문도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만주로 이주했다.

● 독립운동가 14명 배출한 명문가
허형은 경북 선산에서 허희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아우인 허필 역시 독립운동을 했다.

역시 독립운동을 했던 허훈·허겸·허위 등과는 사촌형제 간이다.

허형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허민은 군부주사에 이어 내각 지제교를 역임하였는데, 명필로 이름이 나서 고종의 어명으로 명정전(明政殿)과 명정문(明政門)의 현판을 썼다.

차남은 허발이며, 삼남은 허규로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딸 허길은 안동의 진성이씨 이가호와 혼인해 이원기·이원록·이원일·이원조·이원창·이원홍을 낳았는데, 아들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형은 을사조약 이후 1906년 을사오적 암살 사건에 연루돼 1909년 체포됐으며, 특히 사촌동생인 허위가 1908년 5월 체포된 후 10월 순국하자 이들 범산 가문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허위의 동생 허겸은 1912년 허위의 가족인 제수와 네 아들 및 두 딸을 데리고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로 망명했다. 허형도 1915년 아들 허발과 허규, 그리고 동생 허필의 가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이미 서간도 통화현에 정착하고 있던 종제 허겸 및 허위의 가족과 합류했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출병 직후 허형은 아우인 허필의 가족을 비롯해서 집안조카인 허학과 허국 등 허위의 유족들을 데리고 서간도를 떠나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 후 허위의 유족인 허학과 허국 등은 주하현으로 이주했고, 허형의 가족들은 철령하로, 허필 일족은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를 거쳐 흑룡강성 오상현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1929년 봄에는 하얼빈 부근의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했다.

허형은 1922년 10월 3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서거했으며, 묘소는 만주 목단강 사도구 자전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최초의 서대문형무소 순국지사
허형의 사촌동생 왕산 허위는 1907년 고종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정미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의병장이였다.


전국에서 들고 일어나 의병부대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해 서울 진공을 노리기 위해 출범한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을 맡았다. 당시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했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해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며 한일 강제 병합을 추진 중이던 일본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결국 1908년 6월 11일 양평의 한 골짜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10월 21일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가두고 사형시킨 서대문형무소에서 제1호 사형수로 교수형이 집행됐다.

허위는 사형된 뒤 야산에 버려졌다. 제자인 박상진이 스승의 시신을 간신히 수습해 장례를 치뤘다.

제자 박상진은 스승을 김천 지경리 금오산 부근에 묻었다. 이후 후손들과 왕산의 제자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왕산선생기념사업회는 2012년 묘소를 지금의 자리인 구미시 임은동으로 옮겼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했다는 소식에 목숨을 끊음으로써 저항했던 유학자 황현은 그의 책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왕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고담준론을 좋아하고 천하를 경륜할 역량을 지녔다. 10여 년 서울에 있었으나 권문세가를 상대하지 않고 항상 한적한 여관에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영남의 관로에 오른 사람들이 그를 지모 있는 선비로 임금님에게 알렸다”

● 가난한 후손들
범산의 가문은 일찍이 만주로 이주해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한 탓에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범산의 후손이 대구와 구미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왕산의 장손인 허경성 씨를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대구 산격동에 살고 있는 허 씨는 “할아버지의 거사 이후 가족은 서간도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돌아다녔다”며 “아버지는 한의사를 했고, 나는 1927년 만주 산시(山市)에서 태어나 목단강 부근에서 살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이어 “1945년 러시아가 만주를 침공하자 공산화를 피해 이듬해 어머니·동생들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 왔다”며 “호구지책을 위해 대구시의 임시직원으로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나중에는 중국음식점을 하며 자장면을 배달했다”고 귀국 후의 고생담을 들려줬다.

그는 “아버지의 소식은 여태 모른다”며 “할아버지의 유서와 교지 등 유품은 큰아버지 처가에서 다락방에 숨겨 보관해 온 걸 한국에 들어온 뒤 넘겨받았다”고 말했다.

짧은 인터뷰에도 귀가 어두워서 힘들어하는 모습과 눈물을 훔치던 후손의 까칠한 손등이 필자의 콧등을 찡하게 했다.

현재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는 바로 장손인 허경성 씨가 조상이 살던 터 1990㎡(602평)를 2005년 구미시에 기부해 구미시가 기념관과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허 씨는 왕산 할아버지가 체포된 뒤 가족이 일제의 핍박을 견딜 수 없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뒤 다른 집안으로 넘어간 땅을 귀국 후 짜장면 배달 등으로 모은 돈과 은행 대출로 다시 사들인 땅이라고 설명했다.

당신은 비록 전세를 살지만 후세들이 왕산 할아버지와 당신 가문의 훌륭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기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 후손들 중 일부는 귀국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일제에 쫓겨 이역만리를 전전하다 그곳에 뼈를 묻었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후손들은 중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북한 등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허 씨는 전했다.

허 씨에 의하면 외국에 흩어진 친척들 중에는 국적 회복을 신청했는데 퇴짜를 맞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집을 나서는데 뜨거운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받친 분의 후손들이 국적 회복도 못하고 있다니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떨구며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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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퓨터 2019-03-20 07:37:54
감사합니다.
토착왜구가 사라지는 날이 빨리오길 바랍니다.

곤지암 2019-03-19 23:47:17
들렸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