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⑥ 이육사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⑥ 이육사
  • 조시현
  • 승인 2019.03.15 19:4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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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의 삶 동안 17차례나 옥고를 치루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

이육사라는 이름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의 작품을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서 읽어봤을 것이다. ‘광야’, ‘청포도’, ‘절정’등의 작품을 남긴 그를 우리는 윤동주와 더불어 저항시인, 민족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육사는 사회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에 나와야 한다.

이육사가 고향인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대구 등지에서 활동한 의열단원이였던 사실, 39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무려 17번이나 일제에 의해 감옥에 끌려간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다.

● 의열단원 이육사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3대 후손인 이가호 씨와 경북 구미의 독립운동가 집안인 허형의 딸 허길 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보문의숙에서 공부를 하다 1925년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

출옥한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중국 활동 중, 후에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3년 귀국해,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해 시단에 데뷔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했다.

1937년 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해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된 후,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둘째동생 이원창이 그의 유해를 수습해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으로  이장했다.

바로 밑에 동생인 이원조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월북해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맡았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여러 설이 있지만 6.25전쟁 후 1955년경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원조는 월북하기 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했다.

현재 이육사의 독립유공 서훈은 4급이다. 우리가 흔히 같은 저항시인으로 묶는 윤동주가 3급인 것에 비하면 홀대하는 셈인데 이는 동생의 월북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이육사를 도왔던 사람들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안동에서만 하지 않았다. 그는 대구와 경북 곳곳을 오갔으며,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그의 활동 무대가 넓은 것은 그의 인맥이 작용했다.

그의 외가인 경북 선산 지역의 사람들과 그의 부인의 친가·외가인 경북 영천 지역의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먼저 영천 출신의 조재만이 있었다.

조재만은 창녕 조씨 출신으로, 이육사의 부인인 안일양 여사의 외가 집안 사람이다. 호는 백농(白聾)으로 본명은 조충환(曺忠煥)으로 알려졌다.

1906년 지금의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에서 태어났으며 1990년 세상을 떠났다.

조재만은 1925년 9월 대구에서 장진홍·이원록(이육사)·이원기(이육사의 형) 등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26년 휘문고보 재학 당시 친일교장 배척 사건을 주도하다가 제적당했다.

1926년 융희황제 국장일(國葬日)에 6·10 만세 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자 비록 제적은 당했으나 휘문고보 학생들과 결탁해 적극 참여하는 한편, 재경영천학우회를 조직해 비밀 지하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1926년 10월경 이정기·이육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 요인 및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수시로 접촉했으며, 1927년 10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돼 이육사·이원기 등과 함께 체포됐다.

1928년 1월 대구지검으로 이송된 그는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1931년 봄 다시 북경으로 망명 도중 발각되어 3개월간 구금됐다가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영천에서 산동학원을 차려 지역민 교육에 앞장섰다.

사후인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했던 이병희 여사
진성 이씨 출신으로 191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이경식으로, 장진홍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의거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바 있다. 큰아버지 이원식(이육사의 8촌으로 전해진다)은 안동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이병희는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으며, 어머니는 일제의 감시 속에 말도 잘 못하는 우울증에 걸렸고, 이병희가 옥중에 있을 때 별세했다.

이병희는 15세에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상업학교(서울여상 전신)에 1년간 다니다 중퇴했다.

1933년 5월 서울의 종연방적주식회사 여공으로 취업 후 1936년 회사에서 동료 김희성·박인선 등과 여성동지들을 규합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됐다.

1939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2년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출옥했으나 요시찰인물로 지목됐다.

이후에도 삿뽀로 맥주, 기린 맥주회사, 영등포 방직공장 등에서 노동운동을 해 여러 번 체포, 고문을 받았다.

1940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했다.

동지 박시목·박봉필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1943년 이육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도모하다, 9월에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함께 구금됐다.

1944년 1월 11일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됐으나, 16일 이육사가 감옥에서 순국하자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인 ‘광야’, ‘청포도’ 등 시 작품을 정리해 동생인 이원조에게 전달하는 중책을 맡아 수행했다.

일제시대 노동운동 등을 한 이유로 서훈이 늦어지다 1996년에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됐으며, 지난 2012년 별세했다.

● 연좌제라는 감옥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가면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지난 2017년에 새롭게 지어진 이 공간은 이육사의 문학 작품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들도 공개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관 옆 작은 목재 고택에 이육사의 따님인 이옥비 여사가 살고 있다. 가끔 문학관으로 산책을 나오셔서 관람객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기도 한다.

이 여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집안이었어요. 친구들은 아버지가 투사고 시인이라며 부러워했지만 속으로 지게꾼이라도 좋으니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원망했어요. 삼촌들이 월북(越北)하고 집안에 피해가 많았어요. 연좌제 때문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아버지나 삼촌의 흔적을 찾고 싶었지만 행여 어린 아이들에게 해가 될까 봐 침묵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어요”라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 여사는 “아버지는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는데, 첫째 원기(源祺), 둘째 원록(源祿), 셋째 원일(源一),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 여섯째 원홍(源洪)”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6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했는데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이 터졌을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너무 어려 잡혀가지 않았다”고 들려줬다.
 
이 여사는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며 셋째 원일과 넷째 원조는 월북했고, 다섯째 원창은 셋째 형을 만나러 북으로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황해도 해주에서 폭격을 맞아 숨졌다고 한다”며 “이후 오랫동안 집안의 내력은 불문(不問)에 부쳐졌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의 등 뒤로 이 여사는 “좌우 이념 대립이 심한 이 시대를 살게 된 게 불행”이라고 한탄했다.

● 국어, 문학 교과서가 아닌 사회, 역사 교과서에 실리길
우리는 오늘날 교과서에서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배우고, 또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 있는만큼 ‘저항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육사는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부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돼 수없이 감옥을 드나들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의 친·인척들과 함께 말 그대로 치열하게 싸웠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 모든 것을 받쳐 싸웠던 진정한 독립투사였다.

앞으로 그의 이름이 국어나 문학 교과서가 아닌 사회나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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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2019-03-15 22:27:08
이 시리즈 기사 너무 좋네요~~

웰컴퓨터 2019-03-16 09:08:35
북한과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감추려는 역사는 반쪽짜리 역사입니다.

전종근 2019-03-18 13:48:02
가슴이 먹먹하네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