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③ 월송 김형식 선생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③ 월송 김형식 선생
  • 조시현
  • 승인 2019.03.05 19:3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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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자로 낙인찍혀 침묵을 강요당했던 후손들의 피눈물나는 세월
금기어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이름 석자

20가구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독립유공자가 33명이 나온 곳이 있다.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가 바로 그 곳이다.

안동에서는 내앞마을이라고 불리우는 이 곳은 대대로 의성 김씨들이 모여 살아 온 집성촌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유명한 학봉 김성일이 바로 이 곳 출신이다.

워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까닭에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마을 출신들 중에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 45년 간 금지어가 되어 버린 이름
이렇게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지만 이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은 바로 내앞 출신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아나키스트 계열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마을 주민 대부분이 만주로 이주해 버렸고, 무엇보다 이 마을 출신 중에 월북자가 있으니 어찌 보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였을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내앞 사람들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한 사람은 바로 백하 김대락 선생이다. 그는 모든 가산을 정리한 후 문중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가 석주 이상룡 선생 일가와 함께 경학사(훗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백하 선생은 이미 환갑을 넘은 고령으로 실질적인 일은 그의 조카인 일송 김동삼과 아들인 월송 김형식이 도맡아 했다.

일송은 백야 김좌진 장군과 함께 서로군정서를 이끌던 인물로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다 1931년 일경에 체포돼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를 일제가 길에 버렸는데 일제 감시의 눈길이 무서워서 아무도 수습하려 하지 않자 만해 한용운이 그의 유해를 수습해 심우장에서 화장한 후 한강에 뿌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백하 선생은 1914년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만주에서 결국 숨을 거뒀다. 이후 백하 선생을 대신해 월송은 항일독립운동단체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44년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북만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되자 그는 가족들을 고향으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조선의용군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의 초청을 받아 평양으로 가 김일성 후원회장을 맡았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으로 활동했다. 월송의 공식적인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이후 1950년 금강산 장안사 국영 양로원에서 휴양 중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 남은 자들의 침묵

이후 의성 김씨 문중의 후손들 중 몇몇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문중에 남아있는 재산은 거의 없었고, 만주에서 미처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고역이였던 것은 월송의 월북이었다.

이후 1990년대 무렵 백하 선생의 독립운동 경력이 알려지기까지 내앞 마을 사람들에게 월송의 이름은 일종의 금기어가 됐고 내앞 문중 사람들은 은연 중에 침묵을 강요당했다.

백하 선생의 종증손자인 김시명 씨는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독립운동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로 ‘독립운동’이라는 말조차 못 꺼내게 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후손인 김시황 씨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집안 어른들이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그제서야 왜 우리가 가난하게 살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들 후손들의 노력으로 백하 선생은 1991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하지만 월북한 그의 아들 월송 김형식 선생은 여전히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을 연구해 온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은 “이제는 좌우 이념의 논리를 벗어나서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오로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던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색안경을 쓴 채 그들의 발자취를 뒤쫓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 자체는 색깔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점점 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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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ment 2019-03-06 02:36:50
이런 분들이 많이 알려져야 할 텐데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Movement 2019-03-06 02:36:19
이런 분들이 많이 알려져야 할 텐데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곤지암 2019-03-05 20:05:37
1빠로 댓글 달고 갑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 ..감사....


이후 이들 후손들의 노력으로 백하 선생은 1991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하지만 월북한 그의 아들 월송 김형식 선생은 여전히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출처 : newbc뉴비씨(http://www.newb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