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② 석주 이상룡 선생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② 석주 이상룡 선생
  • 조시현
  • 승인 2019.02.28 19:3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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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臨淸閣)' 이름 되찾기 위해 70년을 바친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사는 모습을 보이면 나중에 누가 좋아서 독립운동하려고 하겠느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5일 KBS방송에서 언급해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경북 안동의 임청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러나 임청각이라는 3글자에는 많은 아픔과 슬픔이 담겨져 있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며,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임청각이 제 이름을 찾는데 70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임청각이라는 3글자에는 바로 지난 100년 우리나라 질곡의 현대사가 오롯이 새겨져있다.
 
● 만주로 건너간 3대(代)
 
석주 선생은 일제의 강제병합 후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1911년 신민회가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한다고 하자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그해 1월 만주로 망명을 결심하고 99칸의 집과 많은 전답을 정리하고, 수백명의 노비를 풀어주고 식솔 50여 명을 모두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1932년 석주 선생은 중국 길림성에서 돌아가셨다.
 
석주 선생의 아들인 동구 이준형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석주 선생의 사망 이후 국내로 들어와 안동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1942년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을 목도하고는 독립이 비관적일 것으로 보고 자결했다.
 
동구 선생의 아들인 이병화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역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1934년 5월 의주군 청성진 일본경찰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6월 2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때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1952년에 병사했다.
 

● 남은 후손들의 삶

이처럼 3대가 만주로 모두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후손들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전 재산을 모두 넘기고 만주로 건너간 탓에 후손들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번듯한 명문가의 후손이지만 자신들의 의지대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임청각이 그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현재 임청각의 어른인 이항증(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선생은 언론과 인터뷰를 한사코 마다한다.
 
이항증 선생은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사는 모습을 보이면 나중에 누가 독립운동하려고 하겠느냐”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항증 선생의 장조카인 종손 이창수 씨께 작은 아버지의 어린시절과 임청각을 다시 찾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창수 씨는 “지금 집안 어른을 맡아주신 작은 아버지 위로 4분이 더 계셨는데 다 일찍 돌아가셨다”며 “그래서 조카 9명을 저 분이 다 맡아 키워주셨다”고 운을 뗐다.
 
이어 “임청각은 이상룡 할아버지께서 망명 후 1932년 혈연관계가 있는 친족 4명의 명의를 빌려 등기를 했다”며 “하지만 이들이 사망한 뒤 종가는 독립운동의 후유증으로 몰락했고, 그 사이 상속법은 장자 단독상속에서 자녀균등 상속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이후 처음 명의자 4인의 아들 딸, 내·외손으로 여러 대가 내려가 임청각 연고권자는 무려 7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됐다”며 “작은 아버지께서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 끝에 법원에 서류를 제출한 지 10년 만인 지난 2010년에서야 임청각 소유권을 고성이씨 종중으로 확정한다는 법원판결을 받아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어 “법원 소송도 힘들었다”며 “변호사 구할 돈이 없다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는데다 승소했다고 해서 가난이 없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작은 아버지께서는 어릴 때 보육원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다. 혼자 하신 게 아니라 밑에 동생인 고모와 함께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들었다”며 “당시 돈이 없어서 보육원 생활을 하면 학비가 들지 않아 그렇게 하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또 “그러나 작은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많아 학교를 마치고는 오후에는 기름통을 메고 다니며 기름 배달을 하셨다”며 “그렇게 모은 돈으로 동생들과 조카들 학비를 대셨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작은 아버지는 오로지 집을 다시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버텨 오신 분”이라며 “60년대 당시 정부는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과 그 후손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작은아버지는 동생들과 조카들 뒷바라지를 하다가 제대로 학교도 못 다니시고 변변한 일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며 “그 때 이 얘기를 들은 친척(탤런트 이서진의 아버지) 어른이 주선해 조흥은행에 취직하셨다”고 전했다.
 
끝으로 이 씨는 “이제서야 정부에서 임청각 복원을 하겠다고 나서주니 정말 고마울 뿐”이라며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독립은 ‘일제가 망친 석주 할아버지의 생가, 옛 모습 찾는 날이 진정한 독립의 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흔히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임청각의 후손들을 보면서 생긴 말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아버지, 형제와 집안을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되어 평생을 가족들 뒷바라지와 집 되찾기에 몰두했던 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은 어찌보면 영화와도 같은 삶이다.
 
이제라도 이런 분들이 사회에서 대접받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임청각을 걸어나오는데 “내가 이리 사는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던 어른의 그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서인지 임청각을 떠올리면 괜시리 눈물부터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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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찬 2019-02-28 19:55:45
좋은칼럼, 감사합니다. 조시현기자님.^^

어우러기 2019-02-28 19:46:51
시의적절하면서도 꼭 필요한 탐사보도 잘 읽었습니다.
조기자님

심지영 2019-02-28 20:28:16
정독하고갑니다^^ 조기자님 퇴마사활동도 활발히 해주세요

서서문 2019-02-28 20:57:11
후손분들 이야기 너무 슬픔니다ㅠㅜ
죄송한 마음 뿐이네요. 기사 감사합니다.

이윤정 2019-02-28 20:36:11
잘 읽고 갑니다.전 요즘 외할아버지가 군자금지원을 해주셨단 얘기를 전해듣고는 이것 저것 알아보는 중이라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조기자님 화이팅입니다.

율사 2019-02-28 23:02:24
애국자의 후손들 삶이 가슴아프네요
문대통령님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이닝스타 2019-03-02 11:14:49
조시현기자님.. 좋은기사 감사합니다.
가슴이 아프고 미안할뿐입니다.

이용순 2019-03-03 10:01:33
좋은기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