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가문 2편 - 덴노를 상징적 존재로 바꾸다
후지와라 가문 2편 - 덴노를 상징적 존재로 바꾸다
  • 정재웅
  • 승인 2019.03.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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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⑨ 헤이안 시대의 개막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주제로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701년, 다이호 율령을 통해 일본에서의 율령제는 확립되었다. 일본의 율령제는 중국 및 한국의 제도와는 차별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여기서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과 한국의 율령제는 황제 혹은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3성[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尚書省)]이 이를 보좌하며, 상서성에 소속된 6부가 실무를 전담하는 제도다.

물론 다른 제도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3성6부제 역시 중국과 한국에서 왕조 변천 및 군주의 권한에 따라 변천을 겪는다.

예를 들어 당에서는 태종 이세민이 상서령을 지낸 까닭에 이후 상서령은 영구 공석이 되어 그 아래 관등인 상서좌우복야가 실질적으로 재상의 역할을 했고,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실질적으로 통합되어 문하성의 수장인 문하시중이 재상의 역할을 했다.

반면 일본의 율령제는 이와 달리 이관팔성일대오위부(二官八省一台五衛府)로 구성된다.

여기서 이관은 국정을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과 제사를 담당하는 신기관(神祇官)을 말하며, 8성은 태정관 아래에 편성된 실질적인 행정기관이다. 이외에 덴노 직속으로 행정을 감찰하는 탄정대(弾正台)와 궁중 경비를 담당하는 위부(衛府)가 편성되어 있었다.

즉 군주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3성6부가 이를 보좌하는 형태인 중국과 한국의 율령제와 달리 일본의 율령제는 덴노와 각 성 사이에 덴노의 권위와 권력을 대리하는 기관인 태정관을 두었다.

이에 더해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하겠지만 일본은 율령제에 근거한 관위에 존재하지 않는 관직인 영외관(令外官)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 

율령제에 기초한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다이호 율령은 그 기반을 645년에 시행된 다이카 개신에 두고, 이 다이카 개신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다.

후지와라노 후히토(659~720)은 아스카 시대 및 나라 시대 초기의 공경대신으로, 후지와라 씨의 실질적 선조로 여겨지고 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659~720)은 아스카 시대 및 나라 시대 초기의 공경대신으로, 후지와라 씨의 실질적 선조로 여겨지고 있다.

후지와라 씨족의 본격적인 번성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차남이자 차기 당주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부터 시작이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 나중에 몬무 덴노(文武 天皇)가 되는 오비토(首皇子)와 딸 쿄묘시(光明子 또는 安宿媛)를 결혼시킨다. 즉 오비토는 이모와 결혼한 것인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근친혼이지만, 근대 이전 관점에서는 특별하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후 오비토가 덴노로 즉위하면서 쿄묘시는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가 되었고, 이를 통해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외척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후히토 사후에는 그 네 아들인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가 권력을 오로지하게 되나, 735년 형제가 모두 천연두로 사망한다. 그러면서 후지와라 가문이 독점하던 권력은 스즈카 왕(鈴鹿王)과 강력한 귀족이던 타치바나(橘) 가문으로 넘어갔다.

일본 4대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은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원평등귤 : 미나모토, 다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 중 둘이 등장했다. 

상술한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의 후손은 각각 후지와라 난케(南家), 훗케(北家), 시키케(式家), 교케(京家)로 나누어진다.

초반에는 후지와라 난케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데, 후지와라 난케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는 755년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실각시키고 권력을 잡았다.

NHK 방송국의 고대사 드라마 스페셜 ‘대불개안’의 한 장면.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NHK 방송국의 고대사 드라마 스페셜 ‘대불개안’의 한 장면.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758년부터 764년까지 고켄 덴노(孝謙 天皇)와 준닌 덴노(淳仁 天皇) 사이에 덴노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다.

고켄 덴노는 어머니인 고묘 황후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 덴노를 준닌 덴노에게 양의하고 조우고로 물러났는데, 같은해 고묘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덴노 복귀를 노리는 고켄 덴노와 덴노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준닌 덴노 간 분쟁이 벌어졌다.

이 분쟁에서 권력은 고켄 덴노가 잡게 되었고, 762년, 준닌 덴노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준닌 덴노는 764년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와 연합하여 고켄 덴노를 몰아내려 하였지만 역으로 고켄 덴노와 연합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진압되니, 이것이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이다.

이 과정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타치바나노 나라마로를 바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이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낸 고켄 덴노[복위 이후에는 쇼토쿠 덴노(称徳 天皇)]가 770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로써 덴무 덴노(天武 天皇) 계열은 단절된다.

일본의 제46대 덴노인 고켄 천황은 일본 역사상 6번째 여성 덴노이자 최초의 여성 황태자였다.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아베 내친왕이고 47대 준닌 천황이 폐위된 뒤 제48대 쇼토쿠 천황으로 다시 즉위했다.
일본의 제46대 덴노인 고켄 천황은 일본 역사상 6번째 여성 덴노이자 최초의 여성 황태자였다.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아베 내친왕이고 47대 준닌 천황이 폐위된 뒤 제48대 쇼토쿠 천황으로 다시 즉위했다.

이에 후지와라 가문은 덴지 덴노(天智 天皇) 계열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대하니 이가 코닌 덴노(光仁 天皇)다.

코닌 덴노는 계승자로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야마노베 친왕(山部 親王)을 세우니 이가 간무 덴노(桓武 天皇)다.

간무 덴노는 784년 나가오카쿄로 천도하였다가 794년 헤이안쿄(현재의 교토)로 천도하고 헤이안 시대를 열었다. 

고켄 덴노부터 간무 덴노까지 덴노에게 협력한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된다.

후지와라 가문의 등나무 문장.
후지와라 가문의 등나무 문장.
이 문장은 진해거담제의 대명사였던 용각산의 겉포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장은 진해거담제의 대명사였던 용각산의 겉포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후지와라 가문의 대두와 권력 장악은 사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에게 신임을 받은 신하의 가문이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차기 군주에게도 신임을 받고 권신이 되는 모습은 중국과 한국에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보통 중국과 한국은 이 단계에서 머물러 있거니 혹은 군주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부리다가 군주의 친위세력에 의해 숙청되는 단계를 걷는다. 우리가 아는 권신의 상당수가 이 행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지와라 가문은 다른 경로를 걷는다.

외척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덴노를 허수아비로 돌려세운 후 셋칸(摂関, 섭정과 관백) 정치를 통해 사실상 군주의 권한을 오로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편집자주 : 오로지하다=혼자 독차지하다)

즉 앞서 살펴본 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는 권위와 권력을 군주가 그 일족 혹은 신하와 분점할 수 없는 데서 기인하는데, 이 문제를 일본은 아예 덴노를 상징적 존재로 돌려세우고 권위와 권력을 신하가 오로지하는 형태로 해결한다.

이 형태는 이후 덴노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찾았을 때도 조우고와 인세이라는 형태로 되풀이된다. 덴노 스스로 자신의 권위와 권력의 정당한 행사 대신 비법적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후지와라 가문의 등장과 득세는 그리하여 어찌 보면 이후 일본 역사에 나타나는 혼란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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