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가문 3편 - 저 보름달처럼 부족함이 없노라
후지와라 가문 3편 - 저 보름달처럼 부족함이 없노라
  • 정재웅
  • 승인 2019.03.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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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⑩ 허수아비여서 가능했던 덴노의 ‘만세일계’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주제로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후지와라 가문이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권신’의 등장과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새로운 군주의 옹립에 협조하고 이후 군주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이 된 후 권력을 획득하여 세도가 형성…. 이러한 과정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결국 군주제에서 국가 통치의 최고 권위와 권력은 혈통을 통해 계승되는 군주 1인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하로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신임을 받아 권력을 위탁받거나 혹은 군주의 친척이 되어 군주의 후견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외척이자 조정의 대신으로서 저 둘을 모두 행했다. 즉 군주가 어릴 때는 외척으로서 셋쇼가 되어 권력을 행사했고, 군주가 장성한 상황에서는 간바쿠가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비록 권력의 획득이 이처럼 비정상적인 양상을 띠더라도 그 행사가 국가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졌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후지와라 가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게 결국 이후 일본의 역사적 경로를 결정짓게 된다.

물론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규슈에서 시작에 혼슈로 이동했고, 호족과 연합 정권을 벗어나지 못한 일본 덴노의 한계에 기인하지만, 사실 그런 문제는 그보다 이른 시기 한반도에 위치한 고대국가도 겪은 문제다. 

후지와라 가문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간무 덴노(桓武 天皇) 옹립에 공을 세우고, 이에 덴노는 후지와라 가문 여성을 황비로 맞아들이는가 하면, 후지와라 훗케(北家)를 중용하여 헤이안 시대는 사실상 이들이 통치를 하게 된다.

후지와라 가문이 처음부터 권력의 행사를 국가의 법적 기반 밖에서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소노히토(위)와 후유츠구
소노히토(위)와 후유츠구

훗케의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실질적으로 태정관의 장관인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까지 승진하여 율령을 정비하고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를 막기 위해 애썼다.

또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조정의 중신이자 덴노의 외척으로 사가 덴노(嵯峨 天皇)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 덴노의 명을 출납하고 문서를 처리하는 일종의 비서실인 구로도도코로(蔵人所)의 장관)에 임명되어 율령 정비에 공헌했다. 

하지만 영국의 초대 액턴 남작 존 달버그 액턴(John Dalberg-Acton, 1st Baron Acton)은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권력의 본질을 통찰하는 명언을 남겼다.

헤이안 시대 일본의 절대 권력을 움켜쥔 후지와라 가문 역시 이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안나의 변은 후지와라 가문이 압도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한 계기가 되었다.
안나의 변은 후지와라 가문이 압도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한 계기가 되었다.

969년 일본에서는 안나의 변(安和の変)이 일어나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이 강화된다.

안나의 변은 간바쿠 겸 다이죠다이진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実頼)와 우다이진(右大臣) 후지와라노 모로타다(藤原師尹)가 연합하여 정적인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를 실각시키고 엔유 덴노(円融 天皇)를 옹립한 사건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후지와라 가문은 자신들이 정적을 실각시키고 덴노를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천하에 보여주었다. 단순히 덴노 사후 그 후계에 영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아예 덴노를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힘을 가진 후지와라 가문에게 누가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사네요리(왼쪽)와 가네이에
사네요리(왼쪽)와 가네이에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사후 집권한 후지와라노 가네이에(藤原兼家)는 982년 자신과 충돌하던 가잔 덴노(花山 天皇)를 퇴위시키고 손자 이치조 덴노(一条 天皇)를 옹립하여 후지와라 가문의 권위와 권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하였다.

군주제에서 국가의 최고 권위와 권력은 군주에게 있고 신하 혹은 친족의 권위와 권력 획득은 군주의 신임과 위임이라는 형태를 갖는다.

하지만 후지와라 가문은 이러한 명목상(De Jure) 절차를 차치하고 자신들이 국가의 실질적(De Facto) 권위와 권력을 가졌음을 군주를 갈아치움으로써 보여주었는데, 이는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에 있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군주를 허수아비로 돌려세우고 신하가 권위와 권력을 오로지하는 형태는 일본사에 있어 이후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모습이 소위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일본 덴노로 나타나는 이유가 된다. 굳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덴노를 갈아치우는 역성혁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성혁명이 필요없었던 일본의 현임 아키히토 천황은 제125대 덴노라고 한다. 
역성혁명이 필요없었던 일본의 현임 아키히토 천황은 제125대 덴노라고 한다. 

혹자는 이러한 모습을 일본 특유의 와(和) 때문이라 평가하는데, 그럴 경우 센고쿠 시대 혼란이나 하극상 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가잔 덴노는 당시 마구 증가하여 농민을 핍박하고 국가 재정을 악화시킨 장원을 억제하고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을 축소시키려 하였고, 이에 후지와라노 가네이에는 덴노를 폐하고 자신의 외손을 옹립하여 권세를 굳혔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은 다이죠다이진과 셋칸(셋쇼와 간바쿠)를 독점하며 권력을 오로지하게 된다.

심지어 일본 조정의 권력 향배는 후지와라 가문의 당주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 따라 결정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정도면 현재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이 후지와라 가문의 후신이라고 할만하다.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 획득과 함께 시작되는 국가 수취체계의 문란과 장원의 확대는 농민의 곤궁을 초래하여 빈번한 농민 반란을 야기했다.

율령제가 와해되었기에 이에 근거한 국가 병력체제 역시 붕괴하여 조정은 무장한 부유한 농민을 무사 계층으로 삼아 군사력으로 동원하였는데, 여기서 우리가 아는 일본의 무가(武家)가 싹트게 된다.

물론 이 무가의 수장인 겐지(源氏, 미나모토 가문)와 헤이지(平氏, 타이라 가문)는 모두 황별씨족(皇別氏族), 즉 신적강하(臣籍降下, 덴노가 자신의 방계를 신하 가문으로 분가함)한 황족이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후지와라 가문의 이러한 권세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때 절정을 이룬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비록 다이죠다이진이나 셋칸이 되지는 않았지만 나이란(內覽)으로서 국가의 기밀문서를 관장하고, 덴노의 명령을 출납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그는 헤이안쿄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를 사실상의 조정으로 삼았다. 또한 형과 조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무려 네 명의 딸을 덴노와 혼인시켰고, 외손들을 덴노로 옹립하였다. 

이러한 권세를 누린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연회 중에 달을 보고 유명한 망월의 노래(望月の歌)를 읊는다.

この世をば わが世とぞ思ふ 
望月の 欠けたることもなしと思へば
(이 세상은 모두 나의 것
저 보름달처럼 부족함이 없노라)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소유한 자의 노래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후지와라 세도의 몰락도 여기부터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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