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1 14:32 (수)
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⑦ 철모자왕
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⑦ 철모자왕
  • 정재웅
  • 승인 2019.02.15 12: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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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할 수 없이 뛰어난 군인이자 행정가였던 도르곤의 오만함과 몰락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주제로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1637년 2월 24일, 남한산성의 성문이 열리고, 인조가 내려왔다. 청 태종 숭덕제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愛新覺羅 皇太極, 애신각라 황태극)가 이끄는 군대에 대항하여 40여일 동안 농성을 한 끝에 마침내 조선이 청에 항복한 것이다.
 
조선 인조는 왕의 의복인 익선관과 곤룡포가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옷을 입고 숭덕제 앞으로 나아가 삼궤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를 행한 후, 청과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일각에서는 저 삼궤구고두례가 머리를 바닥에 찧는 것이고, 세게 찧을수록 충성도가 높다고 생각하기에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낭설이다.
 
삼궤구고두례는 당대의 외교적 예법 중 하나로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당시까지 조선이 오랑캐로 여긴 만주족이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인조는 제후국의 군왕 자격으로 숭덕제의 형제인 친왕들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인조와 청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 애신각라 다이곤)도 인사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다.
 
항복 행사가 끝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심양에 볼모로 보내며 인조가 도르곤에게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니 부디 대왕께서 잘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이에 도르곤이 “이미 세자께서 저보다 나이가 많고, 또한 몸가짐이 바르니 저는 가르칠 것이 못 됩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청 태조는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 애신각라 노이합적)다.
 
이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이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고, 열넷째 아들이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다.
 
 
도르곤의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세 번째 정실인 울라나라씨로 누르하치의 큰 총애를 받았고, 덩달아 도르곤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1626년, 원숭환이 지키던 요동의 영원성을 공략하다 전사했다. 이에 누르하치의 아들과 조카들은 후금(당시는 아직 청을 건국하기 이전)의 차기 한으로 도르곤의 이복형인 홍타이지를 옹립했다.
 
후금의 한으로 옹립된 홍타이지는 올라나라를 순장하였고, 도르곤과 그의 형 아지거, 동생 도도는 한순간에 부모를 모두 잃게 되었으나, 홍타이지는 도르곤 형제를 버일러에 봉하여 달랬고, 조정에 출사하게 하였다.
 
버일러(貝勒, 패륵)는 만주족의 귀족 작위로 터키어 베이(bey)와 동일한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 즉 버일러는 만주족 부족의 우두머리로 해당 부족 내 재산 분배권과 생사여탈권을 모두 지닌 정치적 수장이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어린 도르곤을 앉힌 것은 그 자체가 위로인 동시에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1628년, 홍타이지는 몽골의 차하르를 공격한다. 명이 남쪽에 건재한 상황에서 같은 북방 유목민끼리 싸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건 칭기스칸의 정통성과 그 계승권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칭기스칸과 그 형제들이 속한 보르기진 씨족은 황금씨족(알탄 우룩)으로서 대칸은 그 안에서만 나왔으며, 황후 역시 마찬가지다.
 
몽골 제국의 부마국이 된 고려 역시 황금씨족과 통혼한 것은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과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가 결혼한 것이 유일하다.
 
그렇기에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통성을 가진 몽골을 장악하는 일이 중요했고, 그렇기에 홍타이지는 명에 앞서 몽골 공략을 서두른 것이다.
 
이 1628년 원정에는 당시 17세에 불과한 도르곤도 종군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차하르의 군사를 대파하였고 1200여명의 차하르인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서 1635년에는 도르곤 본인이 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공략하여 마지막 칸인 에제이 칸의 항복을 받고 몽골의 옥새를 획득하였다.
 
▲ 숭덕제(崇德帝, 1592-1643)는 후금의 제2대 한이자, 청 제국의 창업 군주이다. 휘는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Aisin Gioro Hong Taiji).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이를 계기로 홍타이지는 이듬해인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위에 올랐으며, 버일러이자 팔기 중 정백기의 기주였던 도르곤은 그간의 전공으로 청 황족 작위의 첫째인 화석친왕(和碩親王)에 책봉, 예친왕(睿親王)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도르곤은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이 피신한 강화도를 함락시킨 것과 1638년 봉명대장군이 되어 명의 요동 영토를 공략한 것을 들 수 있다.
 
1643년 9월 21일, 청 태종 숭덕제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는 아무런 유조도 남기지 않은 채 52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숭덕제는 생전에 후계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조전은 후계 다툼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당시 황족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누르하치의 차남이자 도르곤의 이복형 예친왕(禮親王) 다이샨은 의정왕대신회의(청의 최고 의결기구, 청 세종 옹정제 아이신기오로 인전이 군기처를 만들며 없어진다)를 소집하여 다음 황위에 대해 논의하였고, 유력 후보로 도르곤과 도르곤의 조카이자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후거가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도르곤은 팔기 중 정백기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동생 도도는 양백기를 관할하였기에 도르곤은 정백기와 양백기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후거는 자신이 장관하던 정람기는 물론 홍타이지의 직할인 정황기와 양황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의정왕대신회의의 의장인 다이샨이 정홍기를, 정친왕 지르갈랑이 양람기를 거느리며 두 세력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도르곤을 황위에 추대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이에 도르곤은 자신이 황위에 욕심이 없음을 주장하며 후거가 주장하는 부자승계의 예를 따르되 홍타이지의 아홉째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푸린(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을 황제로 추대하고 자신과 중도파인 지르갈랑이 좌, 우 섭정왕으로서 국사를 돌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절충책을 내놓았다.
 
후거와 다이샨은 이에 동의하였고 그리하여 6살에 불과한 푸린이 황제로 즉위를 하니 이가 청 세조 순치제다. 
 
▲ 순치제(順治帝, 1638-1661)는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재위 1643-1661)로, 휘는 아이신 교로 푸린,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줄여서 장황제(章皇帝)이다.
 
순치제 즉위 후, 도르곤은 지르갈랑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군대와 조정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후거를 숙청하며 청의 최정예 부대인 팔기를 모두 장악하였다.
 
이후 도르곤은 오삼계와 연합하여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을 격퇴하여 마침내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궁인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1644년 11월 8일, 순치제는 자금성의 태화전에서 다시 한 번 즉위식을 가졌다. 여기서 순치제는 도르곤의 공적이 주공 단에 필적한다며 크게 치하하였으며, 도르곤의 칭호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올렸다.
 
이듬해인 1645년에 도르곤은 자신에게 올리는 모든 장계에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이라 일컫게 하는 등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고 명의 관료제를 도입하는 등 청의 초기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누리던 도르곤은 1650년,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낙마 사고로 인한 부상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뇌줄중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심지어 순치제의 모살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원인을 현재를 사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 명청전쟁의 막바지였던 1644년 5월 27일, 만리장성을 놓고 벌어진 ‘산해관 전투’를 총괄한 청나라의 사령관이 도르곤이었다.
 
도르곤 사후, 그 추종자들은 순치제에게 도르곤을 황제에 추숭함이 옳다고 상주하였고, 이에 순치제는 도르곤에게 성종의 묘호를 올린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이게 도르곤 몰락의 시작이라고.
 
도르곤의 상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추종자들이 도르곤의 형인 영친왕 아이거를 새로운 섭정왕으로 올리고 자신들이 조정의 요직을 맡으려하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었다.
 
이에 순치제와 지르갈랑은 도르곤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하여 도르곤의 세력을 숙청하고, 도르곤의 묘호와 친왕 작위를 박탈하였으며, 부관참시를 하였다. 
 
도르곤은 순치제의 아들인 강희제 연간에 신원되나 황족으로서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1778년 건륭제는 “비록 소인들의 간계에 빠져 전횡에 휘둘렀으나 개국에 큰 공이 있기에” 도르곤을 다시 태묘에 배향함과 동시에 예친왕의 작위를 다시 내리고 시호로 충(忠)을 붙여 예충친왕(睿忠親王)으로 추증하는 한편 양자를 들여 후사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에 더해 예친왕 작위를 철모자왕(鐵帽子王)에 봉했다.
 
본래 청대 친왕들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지 못하고, 그보다 한 등급 낮은 작위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철모자왕은 다른 친왕들과는 달리 영원히 계승되는 작위다. 도르곤의 공적이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 '남한산성'과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최종병기-활’에 등장하는 청나라 왕자 도르곤(오른쪽)
 
청 예충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부인할 수 없는 뛰어난 군인이자 행정가다. 군인으로서 그는 몽골을 점령하고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한 뛰어난 장수였으며, 행정가로는 제국으로서 청의 초기 제도를 설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과 별개로 그는 오만하였으며, 정적을 무리하게 숙청하였고, 엄연히 군주제의 최고의사결정권자인 황제가 존재함에도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키웠다.
 
이러한 그의 오만함은 결국 도르곤 사후 그의 몰락을 야기했다.
 
군주제에서 지고의 권력과 권위는 오로지 군주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야 하며,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업적이 있을지언정, 그리고 친왕이자 섭정왕일지언정 스스로를 높이고 황제에 도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도르곤은 몰랐거나 알았어도 망각했기에 스스로의 몰락을 야기한 것이다.
 
군주제에서 권력은 나누거나 공유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된다. 그 순간 군주의 통치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주제 하에서 군주가 어린 관계로 혹은 큰 공을 세운 신하의 존재로 인해 권력과 권위의 분점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게 군주제 하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다.
 
하지만 이걸 약간의 변칙적인 방법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해결한 경우도 있다. 이제는 그 경우를 알아볼 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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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익 2019-02-20 01:48:33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지라도 이렇게 잘 정리한 글을 통해서 보니 역사는 새로운 흥미가 마구 솟아나는 우물과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