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특별전에 가지 못한 이유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특별전에 가지 못한 이유
  • 곽민수
  • 승인 2019.02.12 11: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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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씨 가문 소장품을 ‘북조선 왕가의 보물’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는 문제의식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널리 호평을 받으며 성황리에 이어지던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특별전이 지난 일요일에 끝이 났다.
 
아쉽게도 가보지는 못했다. 계속 가야지 가야지 마음을 먹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전시 마지막 날인 일요일 오전에 일찍 다녀오려고도 했으나, 전날 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너무 몰입해서 시청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게 되었고,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2달 동안 이어진 이 전시에 가지 못한 이유 가운데 45% 정도는 내 게으름, 또 다른 45% 정도는 내 분주함이다.
 
그러나 10% 가량은 특별전 제목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기도 하다(고 해두자).
 
이 문제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거렸지만, 친분이 있는 선생님들이 이 특별전에 관여를 하셨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전시에 꼭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의 1/3 가량은 전시를 보고 와야지만 쓴소리를 할 자격이 그래도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시에 결국 다녀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 전시가 끝났으니, 간략하게만 특별전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리히텐슈타인에는 왕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제목이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껴 있는 인구 4만의 소국 리히텐슈타인은 분명히 입헌군주국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군주는 왕이 아니다.
 
리히텐슈타인의 공식 국명 역시도 ‘리히텐슈타인 왕국’이 아니다. 영어로는 Principality of Liechtenstein, 독일어로는 Fürstentum Liechtenstein이니깐, 번역하자면 ‘리히텐슈타인 공국’이나 ‘리히텐슈타인 대공국’ 정도가 되어야 한다.
 
▲ 리히텐슈타인공국의 국장
 
나라의 공식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나라의 군주는 왕(king)이 아니라 ‘prince’다. 
 
Prince는 ‘대공’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만, 이 작위가 왕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현대에 와서는 ‘왕자’로 이해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 왕실의 왕위 계승서열 1위인 찰스 왕자의 작위가 Prince of Wales(웨일즈 공)인 사례다.
 
리히텐슈타인의 군주의 정식 명칭도 Prince of Liechtenstein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군주 한스-아담 1세는 왕이라 아니라 ‘대공’ 혹은 그냥 ‘공’이라 불린다.
 
비슷한 예로 ‘Prince-bishop’이라는 작위가 있다. 한국어로는 ‘왕자 주교’가 아니라 ‘주교공’이나 ‘주교후(侯)’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건 교회에 소속된 주교이면서 동시에 해당 주교구에 대해서 정치권력-군사권력까지도 같이 행사할 수 있는 작위다.
 
내가 오랫동안 생활한 영국 더럼(Durham)의 교구가 바로 Prince-bishop이 다스리던 교구였다. 더럼 대성당 바로 앞에는 더럼 성이 있는데, 이 더럼 성은 더럼의 주교, 즉 주교공이 사용하던 관저이기도 했다. 
 
▲ 더럼 성은 더럼의 주교, 즉 주교공이 사용하던 관저이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의 군주에게 주어진 ‘대공 prince’의 작위는 신성로마제국과 관련이 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대공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대공국’이라 불렸는데, 이곳들은 반쯤은 독립된 지역, 즉 영방(領邦)국가(territorial state)였다.
 
리히텐슈타인은 현존하는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이라 할 수 있다.
 
유럽에는 왕국이 아니면서 여전히 독립된 주권을 갖고 있는 군주국들이 리히텐슈타인 이외에도 몇 군데 더 있다. 룩셈부르크, 모나코, 안도라 등이 그렇다.
 
프랑스어로는 Grand-Duché de Luxembourg인 룩셈부르크의 공식 국명은 리히텐슈타인의 그것과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역시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라 번역해야 한다. 모나코 공국 (Principauté de Monaco)과 안도라 공국(Principat d'Andorra)은 리히텐슈타인과 국명의 모양새도 똑같다.
 
요인즉, ‘리히텐슈타인 왕가’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 대공가는 사실상 왕가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리히텐슈타인 대공가’라 불렀어야 더 정확하다. 그리고 그 쪽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유럽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더 유리하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작위에 대한 이해는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고궁박물관은 왕실 유물과 관련이 이는 곳인 만큼, 전시 기획자들이 이 사실을 몰라서 그랬다기 보다는 엄밀한 사실을 애써서 외면하면서 의도적으로 ‘왕가’라는 표현을 리히텐슈타인에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략적인 의미 전달이나 홍보에 있어서도 더 유리한 만큼 이해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이라는 이름은 살짝 비약하자면, ‘사실상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왕이었으니깐’이라는 이유로 언젠가 있을 수도 있는 북한의 김씨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물품들에 대한 전시를 <조선 왕가의 보물> 혹은 <북조선 왕가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거의 같다.
 
그래서 이 특별전의 제목이 조금 아쉽다. 전시에 가지 못한 것은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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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임 2019-02-12 20:50:09
나는 갔다넹~
꽁짜였다넹~ 특별전인데 꽁짜! 완전 개이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