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⑥ 영락제의 경우
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 ⑥ 영락제의 경우
  • 정재웅
  • 승인 2019.02.08 17:5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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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군주제에서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주제로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 명 왕조 제3대 황제인 영락제(1360-1424)의 어진.
 
명 홍무 3년(1370년), 즉 주원장이 제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 11살 짜리 아이가 연왕(燕王)에 봉해진다.
 
이 아이가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다. 나이로 인해 바로 봉지로 가지는 않았고, 21살이 되어서야 봉지에 발을 디뎠다.
 
지금이야 북경과 그 일대가 중국의 명실상부한 중심이지만, 남경이 수도인 명 초기 상황에서 원의 수도인 대도가 있던 이 지역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북으로 달아난 원이 지속적으로 침입해왔는데 연왕 주체는 이를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비록 북으로 달아나기는 했을지언정 유라시아를 장악했던 저력은 남아있었기에 명 개국공신으로 최고의 명장이었단 서달과 상우춘도 종종 패하는 일이 있었던 몽골을 연왕 주체는 단 한 차례도 패하는 일 없이 전승을 거두었다.
 
이에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연왕 주체에게 “네가 있어 북방이 편안하고 내가 안심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만약 황태자가 살아있었다면 연왕 주체는 일대의 효웅일지언정 황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원장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朱標)는 1392년 주원장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정당한 황위 계승자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제위 계승자로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넷째인 연왕 주체다.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연왕 주체가 이방원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상술한 것처럼 주체는 몽골과 바로 면한 명의 최북방을 담당하며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고 몽골의 침입을 모두 격퇴하며 제국의 북방을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렇기에 차기 황태자로 주체의 이름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유교적 명분으로 무장한 학자들은 “장자가 죽었으면 맏손자가 계승함이 옳다”고 주장했고, 이에 주원장은 주체를 황태자로 삼는 일을 그만두고 주표의 맏아들 주윤문(朱允炆)을 황태손으로 책봉한다.
 
이러한 일을 마친 후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1398년 5월 세상을 떠난다. 제위는 21살의 주윤문에게 계승되었으니, 이가 명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다.
 
건문제 주윤문은 황태손 시절부터 할아버지 주원장이 붙여준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황제위에 오른 후 이들을 중용하는데, 제태(齊泰)는 한 부의 장관인 상서가 되었고 황자징(黃子澄)은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당대 최고의 학자로 불린 방효유(方孝孺)를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삼아 측근에 두었다.
 
주윤문과 이들은 당대의 형세를 전한 경제 시절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인 오초칠국의 난 시기와 비슷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이에 전란을 막기 위해서 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삭번정책(削藩政策)을 추진하였다. 
 
삭번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의는 제태와 황자징의 의견대립이 주가 되었는데, 제태는 가장 강력한 연왕 주체부터 삭번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황자징은 다른 번왕을 먼저 삭번하여 연왕의 손발을 제거한 후 연왕을 삭번해야함을 주장했다.
 
격렬한 논의 결과 황자징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마침내 번왕들에 대한 삭번이 시작되었다. 
 
삭번의 첫째 타겟은 주왕(周王) 주숙(朱鏞)이었다. 당시 일이 전개되는 순서를 보면, 1398년 5월에 홍무제 주원장이 죽었고, 6월에 제태와 황자징이 등용되었으며, 8월에 주왕 주숙이 삭번과 동시에 체포된다.
 
이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는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그와 측근들에 의해 삭번정책이 계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위기에 직면한 연왕 주체는 주숙에게는 죄가 없음을 옹호하는 글을 작성해 건문제 주윤문에게 보내는 한편 병을 핑계대며 두문불출한다. 이에 성품이 어질었던 황제는 삭번정책 중지를 명령한다. 
 
틈을 발견한 연왕 주체는 황제 주위의 간신 제거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이 군대를 정난군(靖難軍)으로 불렀는데, 여기서 정난은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한 행위를 지칭하는 ‘계유정난’의 정난과 같다.
 
이 정난의 명분으로는 홍무제 주원장의 유훈이 인용되었다 :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안에 간악한 자가 있다면, 친왕은 곧 병사를 훈련시켜 명을 기다려라. 천자는 제왕에게 밀조하여 진병(鎮兵)을 통솔해 이를 쳐라.”
 
정난군은 13만 정도로 비록 수는 적었지만 백전노장으로 구성된 정예군이었고, 그 수장인 연왕 주체가 뛰어난 지휘관인 반면, 중앙군은 50만이 넘었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다.
 
당시 중국 전역을 장악한 중앙군의 병력과 회복력이 정난군은 한때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중앙군의 틈을 뚫고 수도인 남경을 함락시켰고, 이를 본 황제 주윤문은 스스로 황궁에 불을 질렀다. 천하의 주인은 연왕 주체가 되었다. 
 
▲ 1399년 8월 8일부터 1402년 7월 13일까지 화베이 평원을 배경으로 벌어진 ‘정난의 변’으로 연왕군이 승리를 거두고 영락제가 즉위하게 된다.
 
연왕 주체는 뭇 신하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후 건문제의 신하였던 제태, 황자징, 철현, 경병문 등은 목숨을 잃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경우는 황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인데, 제위에 오른 연왕 주체가 회유하였으나 굴하지 않다가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연적찬위, 燕賊簒位)’는 글을 써서 십족이 몰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지만, 이는 명 관련 정식 사료에서는 기록에 없고, 야사에서만 전해져오기에 신빙성이 낮다.
 
하지만 이 일화 자체는 당대인들이 연왕 주체의 황제 즉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성조 영락제 주체 그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훌륭한 군주다. 내치에 있어서는 대운하를 개수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영락대전을 편찬하는 등 명을 제국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의 더 큰 업적은 대외적 측면이다.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을 친정한 황제는 북위 태무제, 명 영락제, 청 강희제 셋 뿐인데, 태무제와 강희제가 각각 선비족과 만주족 출신임을 감안하면 영락제는 몽골 원정을 강행한 유일한 한족 황제다.
 
이에 더해 그는 베트남을 정복하고, 왜구 정벌을 위해 무로마치 바쿠후와 협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화의 대원정이 이루어진 시기가 이 때다. 
 
하지만 영락제의 이러한 군사원정은 명 제정에 부담이 되어 후대 황제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이에 더해 무차별적인 숙청과 환관 기관인 동창을 이용한 정치로 인해 이후 명에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신권의 약화와 환관의 발흥을 야기했다.
 
이러한 문제는 영락제 본인이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탄압하고 환관을 이용한 비밀정치를 통해 황제 독재 체제를 강화한데서 기인한다. 즉 영락제는 당대의 영광은 가져왔을지는 몰라도 명이 몰락하는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원인은 다시 군주제에서 권력구조의 문제로 회귀한다. 군주의 가까운 친족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지녔을 경우 이는 가깝게는 군주의 지배구조에 위협이 되고, 멀게는 국가의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어 몰락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번왕 체제가 아닌 친왕 체제에서 이 문제는 어떻게 될까. 이를 우리는 청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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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재 2019-02-11 16:30:49
중국황제들은 항상 환관들한테 매인단말이죠

을목남 2019-02-09 19:20:43
오 잼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