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매직’이 우리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
‘박항서 매직’이 우리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
  • 반우희
  • 승인 2019.01.0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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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내려놓고 따뜻이 다가가며 철저한 분석과 명확한 명분 주는 새 리더십

▲ 2017년 10월 베트남축구협회에서 있었던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국가 대표팀·U23대표팀·올림픽대표팀 감독 선임 발표 기자회견 모습.

“나를 선택한 베트남 축구에 내가 가진 축구 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붓겠다.”


2017년 10월 박항서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덤덤하게 말했다. 베트남 성인 축구대표팀과 23세 이하(U-23) 감독으로 선임돼 소감을 전하는 자리였다. 한국인 지도자로는 역대 4번째로 외국 성인 대표팀을 맡는 국내 축구계 ‘역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베트남이라는 ‘축구 변방’으로 인식된 나라를 주목하는 국내 시선은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박항서 매직’이란 찬사가 붙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항서 감독은 부임 직후 베트남 U-23 팀을 이끌고 10년간 꺾지 못했던 태국을 원정에서 격파했다.


오랜 기간 체력이 약하다고 스스로 ‘심리적 한계선’을 그은 베트남 선수들에게 오히려 체력은 준수한 편이라고 다그쳤다. 그러면서도 코칭스태프엔 쌀국수 일변도에서 벗어난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주문했다. 경기 후 근력 회복이 주된 이유였다.


훈련에선 패스 게임 위주의 전술 이해도를 높여 베트남만의 실리 축구를 대입했다.



달라진 베트남 축구대표팀 기류를 두고 현지에서 먼저 호평이 쏟아졌다. 이후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한국의 격을 높였다는 국내 언론의 찬사가 쏟아지기까지 ‘박항서 매직’은 우리가 체감하는 그 이상으로 진화했다.


박 감독 취임 이후 베트남 축구는 ▲U-23 대표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준우승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준우승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 10년 만에 우승까지 수직 상승을 그렸다.


한때 개인적으로 잘 아는 축구 관계자는 베트남인들이 워낙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해 하체가 부실한 데 이것이 축구 약체로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는 꽤 그럴듯한 사회적 분석으로 들렸다. 이제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볼 수밖에 없게 됐다.


그만큼 대다수가 보는 앞에서 박항서 감독은 리더십 하나가 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으며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지 내보였다.


▲ ‘2018 아세안 축구 선수권대회(AFF 스즈키컵)’에서 베트남 국가대표팀의 우승 소식을 전하는 AFF스즈키 컵 베트남 홈페이지의 지난해 12월 15일자 뉴스 캡쳐. “오늘 저녁 9천만 베트남인들이 잊지 못할 것”이라면서 박항서 감독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다.

박항서 리더십을 분석하는 얘기가 차고 넘친다. 구태여 더 보탤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키워드로 리더십을 정의하자면 ‘명분’이다. 박항서 감독은 왜 열심히 뛰어야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며 동기부여한다. 선수들에게 우리 팀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음을 승리에 승리를 더하면서 증명해 나가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엿보인 말이나 행동을 보면 ‘감독 자신’은 후순위다. 경기에 뛰는 것은 어쨌든 선수들이며 그들이 가진 기량을 최대한 끌어내 끝끝내 감독 자신을 비롯한 ‘원 팀’의 승리를 챙기는 치밀한 계산도 깔려있다.


박항서 감독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감독” “저 자신”이란 말을 자주한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하는 셈이다. 물론 이런 인터뷰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인터넷이 발달한 베트남 선수들 모두 보게 된다.


박항서 감독이 부상당한 선수에게 널찍한 비행기 좌석을 양보한 것은 그 모든 장면의 압축이다.


U-23 AFC 챔피언십 결승에서 패해 준우승에 그친 선수들에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우리는 베트남 선수들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말한 것도 그렇다.


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강조한 열심히 뛰어야 하는 명분을 강조하는 한편 다음을 위한 또 다른 명분도 함축한 하나의 워딩으로 통했다.


하나씩 하나씩 이기는 맛을 알아가고 그것이 감독의 말을 따르다보니 된 것이란 인식이 선수들 사이에 퍼졌다. 감독을 향한 믿음은 곧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명분으로 귀결됐다.



여기에 구태여 ‘소통’이라던가 ‘형님 리더십’이라던가 ‘권위 없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건 어찌 보면 구시대적 수사다. 지휘하는 이에 명분을 불어넣고 동기부여를 심어주는 건 리더라는 단어 그 자체에 포함된 지위 역할이기 때문이다.


리더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고심해보지 않은 이들이 단어 안에 포함된 행간을 읽지 못하니 중복 강조되는 셈이다.


종목은 조금 다르지만 최근 프로농구에서 이상범 동부 감독은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걸을 것으로 예정된 스타 출신 김주성에게 “이름값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스타 선수 출신으로 누리면서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앞으로도 살펴보지 못하면 좋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리더란 전체를 샅샅이 따뜻한 눈으로 조망할 줄 아는 게 전제다. 스타 선수 출신 감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스포츠계 격언도 그래서 나왔다.


꼭 알맞게도 박항서 감독은 선수 시절 국가대항 A매치 출전 기록이 1경기일 정도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베트남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 국내 축구계에서도 비주류 지도자 취급을 당했다.


2002 월드컵 4강 코치라는 상징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접을 받아 일부에선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대한축구협회 눈 밖에 났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현 시점에선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그저 흘려듣긴 어려운 면도 분명 있다.


▲ 베트남 국가대표팀 지휘를 맡기 딱 10년 전인 2007년 11월 기사.
 
▲ 그보다 5년 앞선 2002년 10월에 있었던 기사.

‘박항서 매직’의 기저에는 구시대 리더십의 철폐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권위를 내려놓고 철저히 분석해 조직원에게 따뜻이 다가가면서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명확한 명분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베트남에겐 ‘체력이 약해 강팀과 몸을 부딪치기 어렵다’는 자신들 스스로의 프레임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분업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 장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역습 축구’로 이어졌다. 전과 달리 한 경기씩 이기는 습관을 체험하면서 또 다른 명분이 그렇게 떠오르는 선순환을 이뤘다.


눈을 크게 떠 우리 사회 전체를 둘러보면 이러한 리더십이 분명 축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테다.


박항서 감독이 주목받으면서 정치와 경제계에서 그의 리더십을 언급하는 유명 인사들이 늘고 있다. 그들 모두 리더라는 단어에 이미 내포된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생각했을까 궁금하다.


▲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는 지난해 12월 21일 국가대표 축구팀을 정부청사로 초청한 자리에서 박항서 감독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문재인) 한국 대통령도 박 감독과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 두 나라 국민 사이의 마음이 매우 친밀해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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