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선제후 이야기 ④ 끝의 시작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이야기 ④ 끝의 시작
  • 정재웅
  • 승인 2018.11.26 14: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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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후 권한 강화시켜준 금인칙서가 선제후 몰락의 원인 제공

서기 962년부터 1806년까지 840여년 간 지금의 독일을 중심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북부 이탈리아 그리고 폴란드와 프랑스 일부까지 넓은 권역을 지배한 신성 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후기의 ‘황제’를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하고 여러 제후국을 휘하에 둔 나라였습니다.

신성 로마 황제는 선제후(選帝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 영어: Prince-elector)라는 이름의 선거인단이 뽑았는데, ‘선제후’들은 백작이나 공작, 대공 등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위계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봉건 제후들 가운데서도 황제 다음으로 높았다고 합니다.

경제학 박사이자 페이스북에서는 ‘역사 덕후’로 알려진 정재웅 님이 뉴비씨에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연재물은 매주 금요일마다 업로드 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 마르틴 루터가 쓴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과 그에 이어지는 30년 전쟁으로 이어진다.

1517년 10월 31일, 작센 선제후령의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살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고, 이 미약한 출발은 곧 제국 전역을 휩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다.


종교개혁은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리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지만, 역사적으로도 그에 못지않은 의미를 갖는다.


제국, 특히 독일 전역이 300개가 넘는 연방제후령으로 분할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제후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3대 성직제후인 마인츠, 쾰른, 츠리어 대주교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를 선출할 권한이 있는 선제후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 3인의 성직제후와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팔츠 궁중백, 보헤미아 왕 4인의 세속제후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저 성직 선제후(혹은 주교공 Prince-Bishop)는 타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위치였는데, 일단 대주교구의 교구장은 당연직이었고 이에 더해 해당 대주교령의 세속 제후까지 겸하는 막강한 위치였다.


즉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는 해당 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종교를 관할하는데 더해 세속 영주로서 막강한 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의 독특한 체계에서 저 3인의 성직제후는 독특한 지위를 보유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마인츠 선제후국 문장

먼저 마인츠 대주교는 수석 선제후로서 황제 유고시에 선제후 회의를 주관하고, 황제 선거에서 마지막으로 투표할 권한을 갖는데, 이는 동수일 경우 마인츠 대주교가 캐스팅보터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더해 마인츠 대주교는 독일 왕국령의 제국 재상을 겸한다. 쾰른 대주교는 이탈리아 왕국령의 제국 재상을 겸했으며 트리어 대주교는 부르군트 왕국령의 제국 재상을 겸했다.


이 궁정 직위들은 물론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인츠 대주교가 지닌 권한은 막강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작센 공작은 제국 대장군, 팔츠 궁중백은 제국 집사장,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제국 시종장, 보헤미아 왕은 제국 헌작관을 겸했다. 


▲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1490.5.17-1568.3.20) 공작. 1528년경 루카스 크라나흐 데어 알테레가 그린 초상화이다.

1515년, 당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동생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20대 젊은 나이에 할버슈타트 주교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를 겸임하고 있었다.


교회법의 겸직 금지와 나이제한은 교황청에서도 무시할 정도로 유명무실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나중에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메디치라는 가문의 후광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될 정도였다.


야심만만했던 젊은 알브레히트는 2개의 교구의 교구장이라는 지위와 그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입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마침 신성로마제국 최고서열 제후인 마인츠 대주교가 매물로 나왔기에 2만9천 두카트의 고액을 입찰해서 낙찰 받았다.


이 낙찰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는 교황 레오 10세가 유력 선제후 가문의 힘을 키워 신성로마제국 황제위를 차지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비록 교황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마인츠 대주교를 낙찰 받은 알브레히트는 로마에 송금할 현금이 모자랐고, 유럽 최고 은행가인 야코프 푸거(그렇다, 카를 5세에게 선거자금을 대준 그 야코프 푸거다)에게 2만1천 두카트를 빌렸다.


교황청에서는 알브레히트를 도와줄 목적으로 1502년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추기경 시절부터 레오 10세의 측근이었던 요하네스 테첼을 파견하는 한편, 8년치의 대사 선포를 허가하고 그 수입은 대주교와 교황청이 반분하며,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초입세(대주교좌 착좌 후 첫 1년 동안 들어오는 세금)를 제외한 금액은 푸거에게 갚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남발된 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95개조 반박문을 촉발시킨 대사부(편집자주 :통칭 면죄부, 천구교 측에서는 ‘면벌부’로 용어 수정 제안)이다. 


▲ 1521년, 대사(면죄)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 특전 준허 증서.
 
▲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Jacques Callot)가 30년 전쟁의 참상을 그린 ‘전쟁의 엄청난 비극’. 1632년 작.

마르틴 루터라는 한 신학 교수가 쓴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과 그에 이어지는 ‘유럽을 배경으로 벌어진 최대의 종교전쟁, 최후의 종교전쟁, 최초의 국제전쟁’이라 불리는 30년 전쟁(1618.5.23-1948.5.15)으로 이어진다.


30년 전쟁은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 내 가톨릭 제후들의 동맹인 가톨릭 리그 대 신성로마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 동맹과 이를 지원한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가 독일 전 지역과 네덜란드 및 북대서양을 배경으로 하여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싸운 전쟁이다.


이 30년 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포스팅한 바 있기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을 생략하고 그 결과만 간단하게 언급하면, 신성로마제국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일곱 선제후의 영향력은 대폭 축소되었고, 독일은 300여개의 영방국가로 분할되었다.


그러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 등으로 축소되고 북독일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게 나중에 도이치 제2제국을 세우는 프로이센이다.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 카를 4세에 의해서 선포된 금인칙서는 선제후의 권한을 막강하게 해주었지만, 그에 따르는 당연한 귀결로 성직자이기에 세습이 불가능했던 성직 선제후가 매매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그리고 선제후의 몰락이다.


물론 이후에도 선제후의 명맥은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지지만, 그 위상과 권한은 이전만 못하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선제후의 권한을 강화시켜준 금인칙서가 역설적으로 선제후 몰락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경로의존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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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 2018-12-23 00:24:23
아!!!
드디어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이 나오네요.

'끝의 시작', 제목이 너무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