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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바라보는 한국경제 (4) 김대중정부의 IMF 구조조정 해법
논쟁으로 바라보는 한국경제 (4) 김대중정부의 IMF 구조조정 해법
  • 강신홍 시민기자
  • 승인 2017.11.26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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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홍 시민기자의 ‘알기 쉬운 현대 한국 경제 이야기’
참여정부 시절 정치칼럼 전문 사이트 서프라이즈와 노무현 대통령 개인 홈페이지(노하우)에서 ‘꺼벙임다’라는 닉네임으로 경제관련 글을 꾸준히 올렸던 강신홍씨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현재 시점으로 일부 수정해 뉴비씨에 기고하겠다고 알려왔다.

강신홍 시민기자는 “다른 부분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경제는 연속되고 연결되는 것이어서 박정희의 경제부터 IMF외환위기, 대중경제론, 경제민주화, 재벌문제까지 같은 뿌리를 두고 살펴 봐야한다”며 주요 논쟁들을 중심으로 경제 이면의 문제와 설명들을 이어 나가겠다고 한다.

‘논쟁으로 바라보는 한국경제 (부제 : 알기 쉬운 현대 한국 경제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강신홍 시민기자가 올릴 이번 시리즈 글은 총 1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편집자주] 


논쟁으로 바라보는 한국경제 (부제 : 알기 쉬운 현대 한국 경제 이야기) 

- 목 차 -

1. 박정희의 경제 신화는 허구인가? 
2. 1997년 IMF 경제위기의 원인(일본의 생산자본과 미국의 금융자본 전쟁) 
3.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 
4. 김대중 정부의 IMF 구조조정 해법에 대한 논쟁 
5. IMF 이후의 금융구조 논쟁 
6. 대우그룹 해법과 BIFC 와 해외 비밀계좌 
7. 뮤추얼펀드와 해지펀드 그리고 사모펀드 논쟁(타이거펀드, 칼라일과 한미은행, 론스타와 외환은행, 그리고 이명박과 맥쿼리) 
8. 진정한 CEO의 가치는 무엇인가?(옥시 신현우, 현대건설 이명박, 킴벌리클락 문국현) 
9. 주주가치 이론과 대안연대 이론(장하성 과 장하준 누가 옳은가?) 
10. LG카드와 카드채 논란 
11. 미국 발 주택 모기지 논쟁 
12. 경제민주화 논쟁(경제민주화의 모체는 DJ의 대중경제론, 우파의 경제와 좌파의 경제) 
13.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그리고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상장 
14. 양극화 하는 한국경제 – 중소기업 해법은 무엇인가?

***

4. 김대중 정부의 IMF 구조조정 해법에 대한 논쟁

▲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IMF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서명을 하고 있다
 
▲ IMF 구제금융에 따른 경제 어려움 극복을 위한 외화 모으기 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IMF 외환위기 초기 대응

우리 국민들에게 IMF 외환위기는 국가적으로 급격한 경기침체와 대량의 기업부도 그리고 대규모 실업이라는 경제적 고통을 안겨 준 사건이었다.(주 : 2장 IMF 외환위기 원인의 논쟁 참조)

1997년 11월21일 늦은 밤, 임창열 신임 경제부총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97년 12월3일 이른 아침, 그들의 협상 전제조건인 종금사의 영업정지를 이행시켰다.

당일 오후에 임창열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제금융을 위한 정책 이행각서에 서명한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의 ‘경제 주권’은 IMF로 넘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18일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에게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정도로 당시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이고 긴박한 상황이었다.

멀쩡하던 기업과 금융기관이 부도가 나거나 구조조정 등의 압력에 시달렸다. 이자율이 사채시장 연체이자보다 높고 환율도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자 가계와 수입기업들이 부도 위험에 처해졌다.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 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물려받은 건 외환보유고 단돈 39억달러, 원-달러 환율 1965원, 종합주가지수 379포인트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전후 외화 유동성 확보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김 대통령은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자마자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해 IMF 등과의 자금 지원 합의 등을 위해 뛰었고, 취임 뒤 불과 한 달 만에 214억달러를 도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고군분투한 덕분에 천정부지로 치솟던 환율은 안정됐고 금리도 내려갔다.

▲ 1998년 1월 24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인수위 당선자실에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만나 국가의 비상경제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MF구제 금용 요구조건(Conditionality)

IMF는 세계경제에서 금융 통화 부문을 담당하는 국제기구이다. 1997년과 2008년의 세계금융 위기에서 보았듯이 세계 경제는 각국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여기에는 국가 간 정치 영향력과 국제 공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중심기구가 IMF로, 특별히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신용을 공여하고, 채무국들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 깊이 관여한다. 그들의 관여는 경제 회복 과정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구조 전반에 걸쳐서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들의 관여는 IMF의 구제금융 요구조건(conditionality)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구조건’은 금융과 통화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제도 등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다는 것이 문제이다.

1997년 말과 1998년 초, IMF는 우리나라에 금융 요구조건으로 단기적 금융정책과 장기적인 구조적 정책들을 요구하였다.

첫 번째로, 그 당시 IMF가 요구한 단기적 금융정책은 고금리 정책과 통화긴축정책, 재정긴축 정책이다. 

당시 IMF는 시중 금리를 급격하게 인상하고, 통화량은 적정 통화량 이하로 줄이며, 정부의 재정을 긴축하여, IMF 자금을 상환 받는데 이상이 없도록 하려는 목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2장에서 언급한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종금사의 업무정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채무국의 경제상황이나 기업 상황은 고려치 않고 온전히 자기들 자금의 안정성만 도모하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다.

원래 금리변화는 예측 가능하여야 한다. 예측 가능한 금리변화가 기업과 가계에 금리인상에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시중 금리는 하루아침에 10%에서 25-30%로 폭등하였고 급격한 금리인상에 미쳐 준비를 하지 못한 기업과 가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IMF는 지나친 고금리 정책으로 타격을 받은 한국경제에 대해, 정부의 통화량 긴축과 정부의 재정긴축까지 요구하였다.

그러한 고금리와 경기위축들은 건전한 기업도 도산시키고, 실업률도 폭등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IMF의 긴축정책 강요는 지나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노력과 발빠른 대책으로 98년 2/4분기부터는 이러한 긴축정책이 완화되어 금리가 10%대로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는 IMF가 요구한 적 미시정책으로 기업과 금융 그리고 노동의 구조조정정책이다.

환율을 고정환율제나 국가가 간섭하는 제한 범위의 변동환율제를 폐지하고 진정한 변동환율제를 추진하고,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나 정부 지원을 금지하고 명확하고 엄격한 시장퇴출 제도를 채택할 것을 강요하고 경쟁 촉진에 의한 금융산업의 구조조정을 요구한다. 

노동시장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기업과 시장의 자유스런 경쟁을 유도한다.

또한 금융개혁을 통한 재벌의 지나친 차입경영 관행을 쇄신 할것과 기업경영의 투명성 재고를 요구한다. 

사실, 고금리 정책이나 급격한 변동환율제와 같은 금융정책을 제외하면, 구조정책 정책은 우리 경제구조의 숙제이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단 그것이 기업들이 준비할 시간 없이 너무 급속하게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되어야 한다.  

박정희 차입 경제와 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위주 수출 지향적 경제 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그 당시의 경제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질서가 제대로 수립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비록 IMF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요구한 조건이지만, 앞으로 한국의 기업들이 선진적 기업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넘어야 할 과정이다.

한마디로 쉽게 설명하면 IMF에서 우리에게 강요한 금융 분야의 ‘요구조건’은 원화 환율을 올려서(원화가치 하락)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서 외환(달러) 보유량을 늘리라는 것이다. (주 : 원화 환율을 올리면 해외 수출이 늘어나고 수입은 줄어든다. 해외에서 우리나라로부터 수입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환율이 높으니까 싸게 수입할 수 있어서 수입을 늘리게 되고 반대로 우리나라가 해외로부터 수입하기에는 가격이 높아지니까 수입이 어렵게 된다)

또한, 국내에서는 재정긴축 정책이나 금리인상 정책 등을 통해서 외환위기를 벗어나고IMF자신들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라는 요구인 것이다. 

여기에 기업과 금융도 선진국처럼 M&A나 인수합병이 쉽도록 금융과 기업구조를 바꾸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갖추라는 것이다.

▲ 1999년 8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ㆍ재계 간담회.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IMF와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neo-liberalism)는 1970년대부터 부각하기 시작한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기반한 경제적 자유주의 이다.

19세기 자유방임적인 자유주의의 결함에 대하여, 국가에 의한 사회 정책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자유 기업의 전통을 지키고 사회주의에 대항하려는 사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이야말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 이념과 정책들을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프리드리히 폰하이에크는 “시장경제의 자생적 질서를 인위적인 것으로 대체하려면 정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런 정부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가 대중의 능동성을 갉아먹고 정부의 각종 규제로 비효율을 낳아 결과적으로 성장이 둔화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며, 시장에 대한 각종정부규제의 철폐를 요구한다.

이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구호에서 보는 것처럼, 노동조합도 부정하며, 기업활동에 대한 보조금이나 각종 규제를 없애고, 특히 고용관련 규제와 정부의 보호장치를 철폐하도록 요구한다.

재정 정책도 결과적으로 비효율성을 낳는다며 정부의 기능을 극소화할 것을 요구한다. 정부부문의 축소를 요구하며, 궁극적으로 공기업의 민영화를 주장한다. 한마디로 모든 부문에서 ‘유연화’를 주장하여, 자본의 승자 독식을 강요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자유주의 이념은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 정부에서 현실화됐다. 

90년대 들어서는 미국의 10년 호황을 등에 업고 세계 각국에 시장개방과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각종 규제철폐 요구로 선진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의 경제성과를 도둑질하려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문제는 IMF가 구제금융을 주는 대가로 우리에게 요구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긴축재정 정책, 노동 유연화 정책이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 1999년 8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ㆍ재계 간담회에서 재벌 총수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 이날 간담회는 경제부처 장관들의 개혁과제 보고, 오찬, 대화 및 토론, 합의문 낭독, 김대중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 순으로 약 2시간25분 동안 진행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IMF Conditionality 해법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IMF 외환위기 상황을 파악하여 대책을 세워 갔으며, 당선인이 되고서도 다음날부터 후보자 시절에 약속한 IMF의 이행조건들을 지키겠다는 의사부터 표현해야 했을 정도로 급박한 외부로부터의 정치 경제적 압박 아래 처해 있었다.

당선인 시절부터 경기 일산 자택으로 조지 소로스 퀀덤펀드 회장을 초대해 만찬을 열었고 국제경제기구와 금융계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국내로 초청해 활발한 경제외교를 펼쳤다. 

김대중 대통령은 후대의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계파나 인맥보다 능력을 우선시한 인사를 했다. 

당시 1기 경제팀의 핵심인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오히려 김종필과 이회창 등과 친한 인물이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세계 금융의 중심지를 찾아 경제인·금융인을 만나 한국에 투자해달라는 설명회를 여는 등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정을 끌고 나가 외환 유동성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끈 김대중 정부는 바로 취임 후 한 달 만에 214억 달러의 외화를 빌려오는 등 유동성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그러한 다음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 부문에 걸친 강력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IMF는 구제금융을 주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긴축재정 정책을 요구했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은행 퇴출과 부실기업 정리, 재벌기업간의 빅딜로 구조조정, 은행 등의 금융기관 등에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개선 등 사상 유례없는 구조조정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시행한 빅딜과 구조조정은 다음과 같다.

5대 재벌들은 스스로 구조조정할 수 있는 자금과 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 하에 과잉 생산설비를 자체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빅딜(Big Deals)’을 유도했다. 재벌간 사업을 맞교환해 설비에 대한 구조 조정도 하고 생산성을 높여 IMF 금융위기를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다.

반면 6대 이하의 30대 재벌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구조조정을 해나가기에 너무 취약하다는 판단 하에 ‘워크아웃 프로그램(workout program)’을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정부(금감위)의 지도 아래 자금지원을 통해 구조조정을 해나가는 것이다.

사실 구조조정은 시간 싸움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입으로만 경제를 나불대는 박정희나 김영삼 과는 달리 직접 재벌 그룹 총수들을 만나 압박했다.

그 과정에 IMF 경제위기를 오히려 몸집을 불려 해결하려 한 ‘대마불사 신화’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몰락했고, 대북사업에 적극 나섰던 현대그룹은 회사를 분할하여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쌍용·해태·진로 등 재벌 그룹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과거 30대 그룹 중 16개가 퇴출되는 등 한국의 재벌구조가 재편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까지 재벌기업의 주 사업 구조였던 무리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자취를 감췄고, 기업의 경영 방침도 성장 위주에서 수익 위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부실 정도가 심한 은행을 정리하는 한편 대규모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1998년 6월 자력으로 경영 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동화·동남·대동·경기·충청은행을 퇴출시켰으며, 정부는 은행의 구조조정을 위해 99년에만 45조2천억원의 자금을 쏟아 부었다. 보험사 등 비은행권 금융기관들까지 합하면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은 64조원에 이르렀다.

99년 정부예산과 국민총생산(GNP)이 각각 80조원과 486조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투입한 공적자금은 실로 막대한 규모였다. 이렇게 IMF를 극복하기 위한 공적자금은 97년 외환위기 발생 이후 2006년까지 168조3천억원이 투입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IMF 구제금융에 대한 대처는 해외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2년 만에 IMF 구제금융 자금을 모두 상환하고 관리체제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래 표에서 보듯이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6.8%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IMF 구제금융에 따른 그늘

 
그렇지만, IMF의 성공적인 졸업 뒤에는 ‘신자유주의’라는 그림자도 드리워졌다. 

김대중 정부는 규제 완화, 민영화, 시장개방, 정부 역할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의 핵심 처방을 외환위기라는 외부로부터 강제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물꼬를 터주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외환위기를 맞아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노숙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양극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이다.

신자유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고 정부의 개입을 배제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해고를 밀어붙이고 특히 노동운동 진영과 갈등을 빚긴 했지만, 그 핵심에는 과거,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의 성장전략 대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진하고자 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허용과 같은 노동의 유연화 과정에서도 서민의 역할과 가치를 회복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국가 부도사태 앞에서 IMF 요구조건을 수용하느라 일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채택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서 빠져 나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김대중 정부는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상황에서 일부 신자유주의 성향의 정책을 수용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들도 동반 추진하였다.

김대중 정부 들어 외환 위기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크게 확장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제 영역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안정망을 확대하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 빈곤층이 많은 노인들을 위한 노령연금 등이 김대중 대통령부터 시작되었다. 1998년부터 3년 동안 20조원 규모의 실업대책을 위한 정부예산이 집행되었고 국민연금 확대 실시 등 사회 안전망을 확대하는 기반정책도 추진되었다.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김영삼

정확히 지적하면,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대체로 김영삼 정부이다

김영삼 정부는 OECD 선진국에 가입하려는 욕심으로 ‘국제화’ ‘세계화’란 이름으로 규제 완화와 민영화, 시장개방 등을 추진하였다.

OECD는 가입 조건으로 자본시장의 자유화와 거시경제의 안정을 요구한다. 그를 위해 주로 노동 시장의 유연화와 작은 정부, 자유시장경제의 중시, 규제 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중시 등의 형태를 요구한다.

김영삼 정부는 시장개방을 추진하였고, 자본시장 자유화를 위해 외환시장의 개방을 추진하였다.  또한 OECD 선진국 수준의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갖추고자 투자금융사를 종금사로 전환하였다.

비록 대형 노조의 반대에 막혀 실패하였지만, 노동시장의 유연화도 시도하였다.

과거 박정희 시대의 산물인 차입경제, 재벌기업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경제의 근본적 체질개선 없이, 준비 없이 실행한 OECD 선진국 흉내가, 동남아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IMF 외환위기를 겪게 된 것이다.

비판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IMF외환위기라는 외부로부터 강제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분별하게 받아 들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들 정책은 이미 김영삼 정부에서 실행되고 있던 정책들이고, 김대중 정부에서 고금리 정책 등이 너무 급격하게 실행되어 국민들의 피해가 컸던 부분도,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OECD 가입 의욕이 가져온 것이라는 것이다.


DJ노믹스의 명암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 민주화와 남북평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졸업하고, 박정희 체제의 차입경영에 의존한 부실기업이나 경쟁력 없는 금융기관들을 구조조정해서 경쟁력 있는 세계화에 걸 맞는 기업들을 만들었다.

일본이나 미국도 감히 하지 못하던 광통신망을 갖추고 IT와 게임산업의 부흥을 일으켰고, 내재된 부실을 안고 있던 중화학 부분도 과감한 수술을 진행하였다. 

박정희가 중점 육성하였던 중화학공업 부분은 10여년에 한번 꼴로 거액의 구조조정 자금을 투입하는 데도 반복적인 어려움을 겪어 한국경제 발전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반도체와 IT가 없었다면 박정희가 중점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만 가지고는 오늘날과 같은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이 성공한 것이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책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기아동차, 삼성자동차, 쌍용자동차, 대우자동차에 들어간 구조조정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고 묻고 싶다.

최근 몇 년 동안 자동차산업이 이익을 많이 냈던 이유가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환율이 9백원 대로 내려갔었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박정희와 수출장려 정책처럼 원화가치를 떨어트려 수출을 늘이겠다는 정책을 펼쳐서 환율효과로 얻게 된 이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과거 기아자동차의 부실을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정리한 다음 현대자동차에게 넘겨 준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을 일컫는 ‘DJ노믹스’의 기본 명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이다. ‘분배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추구했다. 시장은 철저하게 경쟁과 자율이라는 시장원리에 맡기고, 저소득층 지원은 복지정책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DJ노믹스의 핵심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돋보인 경제·복지 정책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과 우리나라 복지체제의 바탕을 설계한 점이다. 

그렇지만 미국식 시스템 도입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일부 받아들였고, 외부로부터의 경제 개혁은 기대만큼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재벌들은 문어발식 확장보다는 내실 있는 성장의 바탕을 마련해야 했다. IMF 외환위기로 힘을 잃은 중소기업 부분은 재벌 대기업에 흡수 당하고, 재벌의 경제 집중이 더 강화되었다.

금융 개혁은 기대만큼 하지 못했다. 선진국의 금융시스템을 갖춘다고 하였으나 일본식 금융시스템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진정한 경쟁력을 갖지 못했다. 

섣부른 규제 완화로 신용카드 위기를 방조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신용카드 대란으로 이어져 서민들이 고통을 받기도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대중경제론의 변화인가?

1997년12월 김대중 당선인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론을 발표하였고, 이후 추진된 경제개혁 정책들을 일부 노동단체들은 ‘대중경제론’의 배반과 신자유주의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앞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중경제론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서 영향을 받았고 정치·경제적 특권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있다.

당시 박정희 시대의 정치권력과 결탁한 특수재벌과 특수층 위주로 세워진 경제정책과 특혜와 재벌 보호정책은, 농업과 중소기업을 몰락과 도산으로 몰아넣고, 지역, 산업, 계층간 소득 격차는 날로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국민경제는 이질적인 상하구조로 철저히 분해되어 가고 있었으며, 대중경제론 발표 당시에는, 당시의 박정희 경제체제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이론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대중경제론은 비록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서 출발 했지만 출발부터 다른 점이 많았다. 

민족경제론은 특권주의보다는 종속주의를 더 강하게 비판했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생산재 공업이 선도하는 내포적 공업화를 주창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이고 시장경제와 개방에 우호적이며, 비교우위를 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서구의 질서자유주의 성향이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이 추진한 정책도 신자유주의보다는 질서자유주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보다는 질서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대공황 이전의 자유방임주의를 복원하려는 사상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과 시장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질서자유주의는 대공황 이후 확대된 정부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확립을 모색한 데서 차등을 두고 있다.

굳이 김대중 정부를 부르자면,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질서자유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평생 주장해온 경제이념은 개발독재와 특권재벌 지배 연합에 맞서 중소기업과 농어민을 바로 세우는 자립경제이다.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차단 등 특권경제에 맞서려는 그의 근본사상은 경제민주주의에 있으며, 이명박 정부 말기에서 김종인이 주장하고 박근혜가 선거캠페인으로 채택한 ‘경제민주화’와 연결되어 있다.

사실, 박근혜가 경제 민주화를 주장한 것은 박정희의 경제를 부정하고 대중경제론을 옹호하는 사상이어서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출발 당시에는 시대적으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다가 경제가 발전하여 시장의 효율적 기능이 강조됨에 따라 ‘대중참여경제론’으로,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제한 자유주의가 일부 반영되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으로 변모하여 왔으며, 경제민주화의 개념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IMF 처방과 대처는 매우 신속하고 정당 했었다.

또한 IMF 외환위기 이후, 일부 단체에게서 신자유주의 정책이라 비판 받는 노동의 유연화 정책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차원에서 이해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자가 결코 아니며, 파탄에 빠진 박정희와 김영삼의 경제체제를 극복한 위대한 대통령이다.

(다음회에 계속)

참고문헌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조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2015년 경향신문 기획기사)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2006) - 김일영(전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한국 경제 20년의 재조명 – 권순우, 홍순영, 장재철, 김용기, 손민중 외/삼성경제연구소/2006.10.30
외환위기 전후 기업의 구조조정과 성과변화 분석 –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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